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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그 무리들이!!

관리자 (광주남노회,작천교회,목사) 2010-08-04 (수) 17:28 14년전 2130  
 

2008 년 3 월 16 일 (주일) 오전 8 시, 11 시 강진읍교회 주일낮예배


성경본문 : 요한복음 12 장 12 절 - 15 절      

제       목 : 그 때 그 무리들이 


할렐루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총이 오늘 종려주일에 주의 전에 나아온 모든 성도들 위에 은혜로운 성가를 하나님께 올린 성가대원 위에 흘러넘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은 교회력으로 종려주일입니다. 종려주일이 무엇이고 무엇을 기념하여 종려주일입니까?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무리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들고 환영하였습니다. 어떤 이는 종려나무 가지를 열렬히 흔들어대면서 환영하였고 어떤 이는 예수님 가시는 걸음걸음에 종려나무 가지를 놓아두어 예수님이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도록 하였습니다. 이는 무엇이냐? 예수님을 최고로 최상으로 대접한 것입니다. 원래 이런 환영방식은 이스라엘 고유의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속국으로 한 로마제국으로부터 배운 것입니다. 로마의 장군들이 전쟁터에서 승리하여 개선문을 통과하여 들어 올 때 로마시민들은 올리브 가지를 꺾어 들고 흔들거나 그것을 장군의 병거와 말 앞에 깔아 놓음으로 그것을 밟고 영광스럽게 입성하도록 하였습니다. 올리브 가지나 종려나무 가지를 오는 길목에 깔아두거나 꺾어 흔드는 것은 그야말로 더 이상 그럴 수 없이 환영하고 환대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교회가 종려주일을 지키는 것은 성경 요한복음 12 장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근거로 한 것입니다.


오늘 성경본문 요한복음 12 장 12 절을 보겠습니다.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는 것을 듣고.”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는 유대인의 명절 유월절이었습니다. 보통 명절에 유대인들은 유월절을 성도 예루살렘에 와서 지키고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고 가는 것이 상례이기 때문에 당시 예루살렘에는 유대의 각 처에서 올라온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당시 유대나라의 슈퍼스타인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신다는 소식을 듣고 많은 무리들이 예루살렘의 길목에 도열하여 예수님을 환영한 것입니다. 어떻게 환영하였습니까? 요한복음 12 장 13 절입니다.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예루살렘에 와 있던 많은 이들이 종려나무를 혹은 꺾어 흔들면서 혹은 예수님이 오실 길목에 깔아놓으면서 한편으로는 열광적으로 호산나 호산나! 하면서 열렬히 환영한 것입니다. 호산나란 주여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뜻입니다. 아마도 그때 그 무리들은 예수님이 이스라엘 왕이 되시어 이스라엘을 침략하여 속국으로 삼은 로마제국의 군대를 물리치고 이스라엘을 완전 독립시킬 것이라는 소망을 가지고 그토록 열성적으로 환영했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님 당시 약 200 년전에 유대나라가 시리아의 지배 하에 있을 때 유대의 마카비 장군이 한 때 예루살렘을 탈환하여 독립하였을 때도 무리들은 열렬히 마카비 장군을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들고 환영하였던 적이 있었습니다. 나중에 마카비 장군을 무리들은 왕으로 추대하여 당시 그 시대를 오늘날까지 마카비 왕조라 칭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200 년 전의 마카비 왕 보다도 더 능력있는 분으로 여겨졌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은 바에 의하면 죽은 자도 말씀 한 마디로 일으키시고 38 년 지체장애자도 단숨에 걷게 하시며 바다 위를 걸으시며 오병이어로 5 천명을 먹이셨으니 그만한 능력이면 까짓껏 로마제국의 군대들도 단숨에 물리쳐 이스라엘 왕국을 회복하고 다윗왕의 전성시대를 다시금 누릴 수 있지 않겠느냐는 소망에 사로잡혀 그토록 열렬하게 환대했는지 모릅니다. 그 동기와 이유가 어쨌든 큰 무리들이 예수님을 환영하되 박수치면서 호산나! 찬송하는 소리를 높이 지르면서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맞이하였습니다.


복음서를 살펴보면 좀 이상한 것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23 장 15 절에서 18 절을 보겠습니다. “헤롯이 또한 그렇게 하여 그를 우리에게 도로 보내었도다 보라 그가 행한 일에는 죽일 일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때려서 놓겠노라 무리가 일제히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을 없이 하고 바라바를 우리에게 놓아주소서 하니” 18 절 서두에 보면 “무리가 일제히 소리 질러”가 나옵니다. 이 무리들이 무엇을 주장하였습니까? 누가복음 23 장 20 절에서 21 절입니다. “빌라도는 예수를 놓고자 하여 다시 그들에게 말하되 그들은 소리 질러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무엇입니까? 무리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 십자가에 못 박으라! 크게 소리쳤습니다. 무리들이라는 똑같은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복음 23 장에 나타난 무리들”과 “요한복음 12 장에 나타난 무리들”은 같은 무리이겠습니까? 아니면 서로 전혀 다른 무리들이겠습니까? 요한복음 12 장의 무리들은 큰 소리로 호산나 찬양하면서 예수님을 환영하는 무리들이었습니다. 이 무리들은 마치 대선 직전에 BBK 사건을 놓고 이명박 후보를 반대하는 무리들과 이명박 후보를 찬성하는 무리들과 같이 전혀 성격이 다른 무리들이겠습니까? 몇몇의 성서학자들은 요한복음과 누가복음에 나오는 이 무리들은 전혀 다른 무리들이 아니라 같은 무리들이라고 말합니다.


당시 이 무리들은 예수님에 대한 초미의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예수님이 기적을 베푸시는지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귀 기울여 듣는 무리들인데 아마도 예루살렘 입성할 때 기다리면서 환영했다면 그 열성파들은 예수님이 빌라도의 법정 브라이도리온에 틀림없이 거기에도 따라 갔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그렇다면 거의 같은 무리들이 첨에는 예수님을 환영하면서 예수님을 찬양하다가 예수님이 잡혀 가시는 막판에서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높이 외쳤다는 것인데 도대체 같은 무리가 호산나! 하다가 왜 나중에서는 십자가에 못 박으라! 하였을까요?


왜 같은 무리들이었는데 첨에는 예수님을 그토록 찬송하고 환영하던 무리들이 나중에는 예수님을 배척하고 죽이라고 외쳐대던 무리들로 바뀌었을까요? 그렇다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의 입장이 바꿔지셔서 그랬을까요? 언젠가 “명장”이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청나라 말이 배경입니다만 방청운이라는 장수가 전쟁에 패하여 도적떼에 들어가 거기서 두 사람과 함께 세 사람이 의형제를 맺고 피로써 약조를 하며 외칩니다. “형제를 배반하는 자는 피로써 갚음을 받게 될지어다” 그런데 세 의형제는 나중에 정부군으로 들어가게 되고 결국 남경성을 공략하게 됩니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맏형인 방청운에게 큰 벼슬을 줍니다. 맏형 방청운은 첫째 동생의 아내와 몰래 관계를 맺으면서 자신의 부귀영화를 유지하기 위해 첫째 동생을 교묘한 방법으로 죽이게 됩니다. 이때 의형제를 맺은 둘째 동생이 피로써 맺은 약조를 깼다 하여 맏형을 찔러 죽입니다. 죽이면서 자신은 세 형제가 맺은 약조를 지켰다고 외칩니다. 방청운이 죽임을 당한 것은 방청운이 변했기 때문입니다. 피로써 맺은 약조를 깼기 때문에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죽임을 당한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향한 무리들의 태도가 달라져서 예수님을 죽이려 하는데 나름대로 이유가 있을까요? 예수님이 변심했기 때문일까요? 도대체 왜 예수님 당시 그 때 그 무리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라고 하였을까요?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때 그 무리들이 예수님께 대한 기대가 있었는데 예수님이 그들이 기대대로 행동하지 않았기 때문에 배신감 때문에 그랬을 수 있습니다. 마카비 장군과 같이 수도인 예루살렘을 무력으로 탈환하고 다윗의 왕조를 다시 세운 것과 같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로마군대를 물리치고 이스라엘을 로마의 식민지치하에서 해방시켜 줄 것으로 기대했는데 기대와는 달리 예수님은 알쏭달쏭하게 “내 나라는 이 땅에 속한 나라가 아니다!” “검을 쓰는 자는 검으로 망한다” 하시면서 아주 무기력하게 로마의 군병에게 잡히고 문초를 받으니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면서 배신감 때문에 그랬을까요? 충분히 그랬을 수 있습니다. 진리이신 예수님은 변치 않으셨지만 무리들은 자신의 기대가 와르르 무너지면서 예수님을 죽이는 무리들로 갑자기 예수님에 대한 태도가 정반대로 바뀌어진 것입니다.


문제는 예수님이 입성하셨을 때 호산나 찬송하면서 환영했던 무리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소서! 외치는 무리와 전혀 서로 다른 무리가 아니라 같은 무리들이라는 것입니다. 한 무리들 안에 찬양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기도 하고 한 무리들 안에 어떻게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라고 표독스럽게 그렇게 변할 수 있을까요? 


오늘 요한복음과 누가복음에 나타나 무리들에게서 오늘 종려주일에 이 자리에 있는 우리들에게 주시는 레마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첫째, 같은 무리들 속에 예수님을 찬양함과 예수님을 죽이려 하는 잔혹함이 함께 있다는 점입니다. 이 점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야고보서의 말씀이 이를 명쾌하게 말합니다. 야고보서 3 장 8 절에서 10 절입니다.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한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 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무엇입니까? 한 사람이 한 사람의 입에서 찬송이 나오기도 하고 같은 사람 속에서 저주가 나오기도 한다 그 말입니다. 호산나의 찬양과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의 저주를 야고보서 3 장 말씀에 대입해 보면 쉽게 나옵니다. 한 입에서 호산나가 나오기도 하고 한 입에서 십자가에 못박으소서!가 나오기도 하는 것입니다.


꼭 한 무리만이 아닙니다. 한 사람 속에도 여러 인격체들이 동시에 공존할 수도 있습니다. 내 안에 꼭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찬송하는 인격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 안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리게 하는 죄악도 함께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 문제를 가지고 씨름을 하였습니다. 로마서 7 장 21 절에서 24 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사도 바울 안에 선과 악이 병존해 있는 것을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 하는 자아가 있고 죄의 법을 좋아하는 악한 인격이 동시에 자신 안에 있는 것을 인식하면서 괴로워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 안에 한 인격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 안에 한 인격만이 홀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난주에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내 안에 예수님을 사랑하여 1500 만원 홋가하는 향유를 부어드리는 마리아와 같은 거룩한 인격이 내 안에 있는가 하면, 동시에 내안에 예수님을 은돈 30냥에 팔아버리는 가룟 유다와 같은 인격이 동시에 있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심리학자인 칼 융은 우리 안에는 육체가 있고 그 육체 안에는 의식이 있고 그 의식 너머는 잠재의식과 무의식이 있는데 그 의식 너머에 있는 잠재의식과 무의식속에 다중인격이 들어있다고 하였습니다. 한 사람 속에 한사람의 인격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말입니다. 잠재의식 너머에는 내가 상상하지 못하는 인격, 그것이 무척 고결하고 순결한 인격이 있을 수 있고 동시에 무의식과 잠재의식 너머 어딘가에 매우 파괴적이고 매우 비정한 인격이 동시에 공존하고 있다가 그것이 어느 시점에 의식의 세계 속으로 넘어 들어 온다하였습니다.


나는 카인과 살인자로 나타날 수도 있고 주를 위해 순교한 스테반과 같은 인격이 내 안에 공존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 나라고 하는 인격의 깊이 속에 들어가면 의식 너머의 세계에 아돌프 히틀러와 같은 파괴적이고 악마적인 심성을 지닌 인격이 어디엔가 잠재해 있다가 불쑥불쑥 나타나고 동시에 내 안 어디엔가 다른 사람을 위해 대신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내어 준 콜베 신부와 같은 인격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 안에서 자식을 훌륭한 인격자로 학자로 키운 신사임당과 같은 인격이 있는가하면 그저 뺑덕 어미와 같은 인격이 동시에 있는 것입니다.


어떤 이는 그런 말을 합니다. “저는 하두 복잡해서 하루에도 천사와 악마사이를 열 두 번도 더 왔다갔다합니다.” 복잡한 사람만 그러지 않습니다. 현실적인 인간이 다 그렇습니다. 천사 같을 때도 있고 악마와 같을 때도 있지만 결국 나라고 하는 한사람 속에서 있는 잠재되어 인격입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에 전범들을 재판하는 가운데 유대인으로서 그 전범을 지켜본 한 작가가 너무도 놀란 것이 있었습니다. 그 재판소에는 유대인을 600 만명을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넣어 다 독가스로 죽여 불에 태워 죽였던 전범들이 다 잡혀왔는데 그들이 악마와 같은 흉악한 모습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법정에서 증언하는 그들이 너무도 평범한 인간의 모습이고 보통 사람들이고 자유에 목말라하고 살고 싶어 하는 지극히 평범한 인간이어서 너무너무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들은 늑대와 같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무척 악귀들과 닮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보니 너무도 보통이고 법정 앞에 선 초라한 보통 인간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한 사람 안에 늑대와 이리도 있고 동시에 그 사람 안에 순한 양도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내 안에 예수님을 호산나하고 찬양하는 인격도 있지만 동시에 내안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려는 인격이 동시에 공존하여 있을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속에 있는 나의 다중 인격 속에서 내가 무엇을 선택하느냐 내 무의식과 잠재의식 너머에 있는 인격들 중에 내가 무엇을 선택하여 내가 무엇을 의식과 행동에 토스하느냐에 따라 나라는 인격이 가롯 유다가 될 수도 있고 나는 예수님을 지극히 사랑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부은 마리아가 되기도 한 것입니다.


내 자유의지로 어떤 인격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와 같이 성경에 길이 남는 영적부부로 기록되기도 하고 내 안에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같은 주의 종을 속여 거꾸러져 죽은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 같이도 되기도 한 것입니다. 내 자유의지로 악한 인격을 몰아내고 선한 인격을 붙잡을 수 있고 반대로 선한 인격을 몰아내고 악한 인격을 발전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 성경에 나온 “그때 그 무리들”은 21 세기를 거슬러 올라간 옛날옛날 사람이거나 전혀 나와는 상관없는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약성경을 보면서 손가락질하면서 비판하고 비난할 수 있습니다. “아이구 이스라엘 자식들! 어떻게 구세주 예수님을 호산나! 호산나! 찬송했다가 금방돌변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소서!!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그렇게 할 수가 있는 것이야! 배신을 밥먹듯 하는 것들! 변덕이 죽 끓듯하는 이들!! 이랬다 저랬다하는 것들!!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하는 것들!!”이라 비난의 화살을 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그때 그 무리들"을 비난할 수 있습니다. 비난하는 것은 자유입니다만 내가 손가락질하고 비난하는 그 때 그 무리들 안에 내가 들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때 그 무리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는데 유감스럽게도 그 못 박는 무리들 속에 내가 있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부인한 수제자 베드로를 비난하지만 내 속에 베드로의 모습이 들어 있습니다. 나도 예수님을 부인하는 인격이 들어 있습니다. 내가 가룟 유다를 비난하지만 내 속에도 가룟 유다가 들어 있습니다. 내가 살면서 예수님보다도 세상의 물질을 더 귀하게 여기지 않았습니까? 예수님께 향유가 부어질 때 “아이구! 저 아까운 돈을 그냥 일회용으로 막 부어 버리는구나!” 예수님을 더 생각하기 보다는 경제를 더 생각하고 세상의 값어치를 더 아깝다고 여기는 나는 없습니까? 이사야 53 장 4 절에서 5 절입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나의 허물 때문에 나의 죄악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입니다. 우리의 죄와 악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시게 했는데 나는 그때 그 무리들 안에 없었다고 나는 그 무리들로부터 자유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때 그 무리들이 예수님을 고발하고 예수님을 못 박히시게 하고, 예수님을 피흘려죽게 했는데 나는 그때 그 무리들 속에 없었다고 알리바이를 증명할 수 있습니까 그때 그 무리들은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친 무리들만이 아닙니다. 그 무리들 옆에 또 다른 그때 그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 예수님을 채찍질한 로마군병도, 예수님께 침뱉은 군병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군병도 그때 그 무리들입니다. 이들은 다른 누구가 아닙니다. 이들은 결코 나와 전혀 상관없는 무리들이 아닙니다.


그때 그 무리들은 오늘 여기 이 자리에 있는 저와 여러분의 일그러진 우리들의 자화상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 외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그 무리들은 바로 우리들의 죄된 실존의 모습들을 보여주는 거울입니다. 그들을 보고 비난하고 예수님을 그렇게 십자가에 달리게 했다고 저주하고 욕하는 것이 아니라 그때 그 무리들의 모습 속에서 나의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그것이 성경을 읽는 바른 자세요! 그것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로 바라다보는 참된 나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였습니다. 마태복음 23 장 29 절에서 33 절입니다. “화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이르되 만일 우리가 조상때에 있었더라면 우리는 그들이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데 참여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니 그러면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자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명함이로다 너희가 너희 조상의 분량을 채우라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예수님의 이 말씀은 무엇입니까? 조상의 모습 속에서 너희의 모습을 보아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너희가 손가락질 하는 사람들 속에 분명하게 있는 너희의 모습, 그때 그 무리들 속에 있어서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너희의 모습,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는 너희의 모습을 보아라!는 말씀입니다.


내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내 죄를 뉘우칠 때 우리는 비로소 성경을 바로보고 성경을 바로 읽고 우리는 그때서야 비로소 은총의 예수님을 만나고 십자가의 은혜를 체험하게 됩니다. 우리가 내 자신의 모습 속에서 그때 그 무리들을 보고 내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본디오 빌라도의 손을 씻는 모습을 보고 내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가룟 유다를 볼 때 바로 그때서야 비로소 나는 죄인에게 내려 주시는 십자가의 은총을 받습니다. 만약 그때 그 무리들 속에서 내 모습을 찾지 못한다면 나는 진리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진리의 수박 겉만 핥다가 내 인생 그렇게 끝나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그때 그 무리들 속에서 내 모습을 찾지 못한다면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총을 받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여러분 속에 있는 참으로 다중 인격 안에서 예수님께 향유를 붓는 여인, 예수님을 향하여 호산나 찬양하는 무리들,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이들을 여러분 자신의 인격으로 만들어 가시기를 바랍니다. 저와 여러분들 속에는 실로 말로 다할 수 없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인격들이 우리 안 어디엔가 내재해있습니다. 저는 김희애라는 탤런트가 나오는 TV 드라마는 놓치지 않는 편입니다. 그가 특별히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그가 소화해 내는 극중 인물의 범위가 넓기 때문입니다. 정반대의 인격들도 그 사람 안에서 소화해 내지 못한 것이 없습니다. 김희애는 어떤 연기가 주어지든지 그 역을 마치 천부적으로 잘 맞는 듯이 잘 수행해 냅니다. 언젠가는 연속극에서 청순가련형의 아내로 나왔습니다. 남편이 바람을 피는데 끝까지 남편을 두둔해주고 남편을 용서해 주고 남편이 바람을 피는 대상인 그 여자를 찾아가 부드럽게 말해주고 그 여자의 편에 서서 생각해주고 애처롭게 여겨줍니다. 그야말로 천사표 아내였습니다. 그러나 얼마 전 텔레비전의 드라마 “내 남자의 여자”는 남의 남편을 빼앗아 내 남편으로 만드는 표독스러운 악녀로 나옵니다.


인격이나 모습을 “페르조나(Persona)"라고 합니다. 김희애라는 탈런트 속에 전혀 다른, 아니 극단적으로 대조되는 두 페르조나가 나타납니다. 김희애 씨는 연기를 하면서 때론 자신속에 있는 천사를 끄집어내기도 하고 때론 자신 속에 있는 악녀를 끄집어 내 연기를 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들 속에는 실로 여러 페르조나가 여러분의 의식과 무의식 속에 잠재해 있습니다.


저와 성도 여러분의 잠재의식과 무의식 너머에는 예수님을 단돈 팔백만원 정도인 은돈 30 냥에 팔아먹는 가룟 유다도 있을 수 있고 예수님께 자신의 전 재산이기도 하고 전 생명이기도 한 옥합향유를 붓기도 한 마리아도 있습니다. 여러분의 무의식과 잠재의식 저 너머에는 예수님을 환호하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호산나 찬양하면서 환영하는 페르조나도 있고 표독스럽게 이리와 늑대의 눈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라! 외쳐대는 피와 같이 붉은 죄인의 페르조나도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 안에 예수님의 양발과 양손에 십자가 못을 박아대던 로마군병의 그런 페르조나도 있고 여러분 안에는 예수님 십자가 앞에 한없이 눈물을 흘리는 페르조나도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이 여러분 속에서 무엇을 꺼내느냐는 여러분의 자유의지 속에 달려 있습니다. 진실로 바라기는 저는 강진읍교회 성도 여러분의 생활 속에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로마군병들이나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라는 매정하고 잔혹한 페르조나를 꺼내오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부인하는 베드로의 페르조나나 은돈 30 냥에 예수님을 팔아버린 가룟 유다의 페르조나를 꺼내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의식을 넘어 무의식과 잠재의식 너머 그 깊이 속에 있는 그토록 예수님을 사랑하여 향유를 뿌린 마리아를 여러분의 페르조나로 발전시키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안에 결코 누가복음의 그때 그 무리들 안에 있지 마시고 여러분 안에 요한복음에 있는 그때 무리들 안에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속에 예수님을 환영하고 호산나 찬양하는 요한복음의 그때 그 무리들의 페르조나를 여러분의 것으로 삼으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은총의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저희는 참으로 죄인입니다. 피보다 더 붉은 죄인입니다. 저희 속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로마군병도 있고 예수님을 향해 십자가에 못 박으라 외치는 그때 그 무리들 중에 저희 자신이 있음을 고백합니다. 은총의 하나님 아버지! 저희의 피와 같이 붉은 죄를 다 용서하여 주옵시고 저희가 참으로 은총의 예수님 사랑하면서 예수님을 환영하고 호산나 찬양하며 살게 하시고 예수님께 귀한 것을 부어드리고 향유를 부어드리면서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눈물 흘리는 그런 긍휼의 가슴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귀하신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니다. 아멘.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6-11-03 21:30:07 총무 칼럼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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