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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야섭

“나도 안다 내 아들아” - 제1부 맑은 샘 줄기 용솟아 -효촌의 출생, 가문, 유소년기 -

배야섭 (광주노회,,목사) 2018-05-08 (화) 20:28 6년전 2930  

나도 안다 내 아들아

효촌-아들 대화록

 

1 : “맑은 샘 줄기 용솟아

-효촌의 출생, 가문, 유소년기-

 

효촌-아들 대화록의 시작

아 들 : 아버지! 제가 그동안 아버지 구술을 받아서 회고록을 집필해 드린다 약속했는데 아직도 시작을 못했는데요. 최근에 뭔가 생각이 번개같이 떠오르는 게 있었습니다. “그렇지! 아버지와 아들의 대화로 만들어보자! 아들이 아버지의 삶의 알파 부분에서부터 물어보면 아버지는 대답을 하시고!” 그렇게 만들어 볼 생각을 하니까 이상한 기쁨이 차올랐습니다. 좋은 작품으로 한 번 만들어볼께요!

 

아버지 : 고맙다! 그동안 두 권의 책이 나왔는데 첫 번 째 책이 <광야에서 가나안으로>이지! 그건 내 설교와 다른 이들의 설교가 합쳐진 것이었어! 두 번 째 책이 <희년의 복음과 함께 새로운 세기를 향하여>였어! 그 책이 나왔을 때 내가 감격스러워서 책을 부둥켜 안고 울었다! 그런데 세 번 째 책이 나온다고 하니까 마음부터 우선 설렌다! 자서전은 나도 쓰고 싶었다마는! 나이가 팔십이 넘어가니까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말을 잘 듣지 않는구나!

아 들 : 아버지! 대화록은 아버지의 삶을 일곱 부분으로 나누어서 한 부분 한 부분 아버지의 삶이 드러날 수 있도록 여러 각도에서 질문들을 하려고 합니다.

 

아버지 : 그래 제목은 뭐라고 정했냐?

아 들 : 지난 번 강남교회 전병금 목사님*과 함께 승용차로 경주를 내려갈 때가 있었거든요. 그때 그런 구상을 말씀드렸더니 나에게 좋은 책제목이 떠오른다 하시고는 나도 안다 내 아들아!로 하면 좋겠다 하시더군요. 야곱이 말년에 요셉의 두 아들을 축복하려고 장자와 차자 므낫세와 에브라임의 머리에 요셉이 우수와 좌수를 장자와 차자 위에 얹으려 하자 아들 요셉이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하자 야곱이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말한 대목입니다. 아마도 전 목사님은 저와 아버지를 잘 알기 때문에 아버지와 아들의 대화록의 제목을 주신 것 같습니다. 생각해 보면 참으로 기가 막힌 제목입니다.

 

아버지 : 전병금 목사님은 참으로 고마우신 분이다. 내가 제 79 회 총회를 총회장으로 섬길 때 총회서기를 하신 분이고 너를 위해서 그동안 많이 도와주었고 우리 신철이가 강남교회에서 전도사를 하니 삼대에 걸쳐 그 연이 이어지는구나. 책 제목이 내가 보기에도 참 좋다. 나중에 제목을 만들어 준 값을 전 목사님께 톡톡히 해라.

아 들 : 말씀대로 그렇게 하겠습니다. 가만히 대화록 제목이 되뇌어 볼수록 좋은 것 같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대화록인데 제목이 성경에서 야곱과 요셉의 대화에서 나오는 것이 좋구요! 또 아버지의 존함 야()자와 야곱 할 때 자가 같아서 좋구요! “나도 잘 안다 아들아!” 하였으니 아들을 잘 아는 아버지의 삶을 대화를 통해 알아가는 여정은 참으로 의미가 있을 것 같습니다. 아버지의 삶을 한 일곱 부분으로 쪼개서 정리를 해 볼랍니다.

 

아버지 : 그런데 내 삶을 일곱 부분으로 어떻게 나눌 것이냐?

 

아 들 : 일곱 부분은 대충 이렇습니다. 첫째 부분은 아버지의 출생부터 신학교를 가시기 전까지. 둘째 부분은 신학교 시절과 교회 개척시절. 셋째 부분은 군선교와 군목 시절. 다섯째 부분은 가나안교회 개척 시절, 여섯째 부분은 교단과 한국교회를 위해서 봉사하신 시절 즉 한국기독교장로회 부총회장과 총회장으로 봉사하시던 시절과 은퇴하시기 직전까지 입니다. 일곱 째 부분은 은퇴하시고 난 다음부터 지금까지입니다. 그렇게 나누어도 괜찮겠습니까?

 

아버지 : 그것은 네 마음대로 해라! 은퇴하고 난 다음에 뭐 쓸게 있을지는 모르겠구나!

 

아 들 : 아니요 무척 많습니다. 아버지의 목회에 대한 회고, 은퇴 이후에 어떻게 활동하고 계시는지! 그리고 건강은 어떻게 유지하시는지! 친구들과는 어떻게 사귀고 계시는지! 한국교회와 교단을 위해 자식들을 위해 어떻게 기도하고 계시는지! 오히려 더 대화하고 구술하실 것이 더 많으실 것입니다.

 

아버지 : 일곱 토막으로 삶을 나눈다면 지난 번 <희년의 복음과 함께 새로운 세기를 향하여> 같이 각 부분의 제목이 있는거냐?

 

아 들 : ! 첫 장은 김재준 목사님이 작시하신 찬송가 582 3 절 첫 소절에서 골랐습니다. “맑은 샘 줄기 용솟아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장도 찬송가에서 216 성자의 귀한 몸 날 위하여” 4 절에서 집자하였습니다. “만 가지 은혜를 받았으니인데요 모든 장을 찬송가에서 초록할 예정입니다.

 

아버지 : “만 가지 은혜를 받았으니그거 내가 즐겨 부르는 찬송가 18 번이다. 그런데 첫 부분의 제목을 맑은 샘 줄기 용솟아로 한 무슨 뜻이 있는거냐?

 

아 들 : 기장의 창설하신 분이 지으신 것이기도 해서 했지만 우리 집안에 복음이 들어온 것이 할아버지 때에 들어왔으니 아담족보 안에 아브라함의 믿음의 족보가 들어오게 되었으니 그것을 맑은 샘 줄기 용솟아!”로 가닥을 잡은 것입니다. 괜찮으시죠? 아부지!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만 아버지가 명예신학박사학위를 받을 때 감사의 인사를 하셨던 말씀이 기억납니다. “만가지 은혜를 받았으니 내 평생 기쁘나 슬프나 이 몸을 온전히 주님께 바쳐서 주님만 위하여 늘 살리라찬송가 가사에 있는 이 딱 한마디만 하시고 스마트하게 인사말씀을 가름하셨습니다. 그때 아부지가 참 멋있게 보였습니다. 저 역시 주님께로부터 만 가지 은혜를 받은 몸이고 아부지로 부터는 수 천 가지 은혜 이상과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 수 천가지 중에 단 한 가지라도 갚아나가야 할 텐데 한 두 가지도 못갚아 나가고 있어서 면구스럽습니다. 금번 대화록을 잘 만들어 헌정해 드리려 하는데 그것으로 천 가지 중 한 가지를 갚았다고 보아도 되겠습니까?

아버지 : 그러고 말고!! 그것 이상이지! 야곱이 바로왕 앞에서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다고 했지! 나도 가만히 지나온 생을 돌이켜 보면 창세기의 야곱만큼이야 했겠냐만 참 파란만장했다! 죽을 뻔한 고비도 수없이 넘기고! 내 나이 이제 팔십 셋인데 이렇게 팔팔하게 살아있는 것은 그야말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닐 수 없다. 찬송가에 그 가사가 있잖냐? “태산을 넘어 험곡에 가도 빛 가운데로 걸어가면 주께서 항상 지키시기로 약속한 말씀 변치 않네!” 그런데 이 찬송은 나에게 있어서는 약간 다르다! 내가 빛 가운데로 간 것이 아니라 내가 빛 가운데로 가니까 주께서 지켜 주신 것이 아니라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 빛도.... 주님께서 나로 하여금 빛 가운데로 가게 하시고 그리고 항상 지켜주셨던 것이라 보는 것이 정확하다! 내 인생 주님의 은혜를 빼버리면 암것도 아니지!

 

효촌의 이름

 

아 들 : 아부지! 저는 가끔 저와 동명이인이 있는가 살펴보는데 언젠가 <인사동스캔들>이라는 영화를 보니까 여자 주인공의 이름이 배태진인데 아주 악녀로 나오더군요. 그리고 인터넷에 보니까 배태진 이병도 있고 배태진 교수도 있고 여럿이 있어서 배태진들이 한 번 모여볼까도 생각했습니다. 근데 아부지의 존함이 배 자이신데 아부지의 이름이 하두 독특해서 서울시 전화번호부에도 똑같은 이름이 하나도 없고 인터넷을 쳐보아도 아버지 이름 외에 동명이인이 하나도 없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아버지 이름은 할아버지가 지어주셨을텐데 혹시 야() 자가 야곱할 때 야() 자가 아닙니까?

 

아버지 : 너네 할아버지가 너네 아버지 이름을 지을 때 야() 자에 두 가지를 넣으신 것 같다. 하나는 야곱 할 때 야() 자고 다른 하나는 야()는 야소(耶蘇)할 때 야()인데 예수님을 한문식 표기로 그렇게 불렀다. 너네 할아버지 배상우 집사님이 내 이름을 그렇게 지은 것은 야() 자가 가운데 있는 것과 같이 예수님을 가슴에 품고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으셨고 야곱과 같이 신앙생활을 잘하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섭() 자는 우리 집안의 항렬이란다.

 

아 들 : 아부지의 야() 자를 야곱 야() 자로 하고 싶으세요 아니면 야소(耶蘇) () 자로 하고 싶으세요?

 

아버지 : 물론 야소(耶蘇) () 자로 하고 싶지만 내 안에는 야곱과 같은 지극히 이기적이고 현실적인 모습도 없지 않다. 야곱이 하나님 앞에 죄인이듯 나도 하늘 앞에 머리를 들 수 없는 죄인 아니겠냐? 성경 창세기에 나타난 야곱은 한편으로는 약삭빠르고 자기 이익만 챙기는 면모가 있지만 그러나 한편으로는 하나님 앞에서는 늘 엎드리고 기도하는 신앙적인 인간이었다. 우리가 야곱을 쉽게 비판하지만 야곱 보다는 훨씬 더 약삭빠른 모습은 많지만 야곱보다도 훨씬 덜 신앙적인 삶을 살고 있는 것 아니겠냐? 야곱의 좋은 면을 본받으려 하고 예수님을 닮으려 애쓰라고 그 깊은 뜻 가운데 내 이름 속에 야자가 있다고 생각한다.

 

효촌의 출생

 

아 들 : 아부지의 주민등록번호는 331125 로 시작하는데 아버지가 태어나신 날은 왜 1931 년 음력 7 26 일이신거죠?

 

아버지 : 내가 태어나던 때는 의학도 덜 발달되었고 무슨 산부인과 병원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아이들이 태어나자마자 많이 죽었었다. 탯줄을 자를 때 그냥 부엌칼로 사용했었고 위생적인 관념이 없어서 3 명이나 4 명을 낳으면 그 중에 하나는 죽었었다. 그래서 백일기념이 있었고 돌이 있었지! 1931 년에 태어 났는데 너네 할아버지가 그차저차한 이유로 1933 년에 호적에 나를 올렸을 것이다.

 

아 들 : 태어나셨다던 배씨 제각(祭閣)을 아부지와 함께 가보았는데요 강진읍에서도 동떨어진 곳에 있었고 초라한 집이었는데요? 왜 거기서 사셔야 했나요?

 

아버지 : 그 당시 찢어지게 가난했고 집을 구할 만큼의 재산도 없었던 것도 한 몫을 했다. 당시 그 형편을 알았던 배씨 종친회에서 긍휼히 여겨 거기서 살도록 했지! 나도 거기서 태어난 거야! 예수님이 태어나셨던 베들레헴 마굿간보다는 나았겠지만 그 당시는 지금은 제각이 그런대로 잘 지어졌지만 그때는 참으로 형편없었지!

 

효촌의 고향과 당시 시대적 분위기

 

아 들 : 태어나실 때가 그러니까 1931 년이면 일제에 의해 한일합방이 된지 21 년째 되는 해인데요. 그렇다면 태어나실 때 이미 나라의 주권을 빼앗겼을 때인데요. 어떤 울분 같은 것을 느끼셨어요? 또 그때 초등학교를 다닐 때 식민통치하에 있었을 때인데 당시 어떤 느낌이 드셨어요?

 

아버지 : 내가 태어난 곳 주소가 전라남도 완도군 고금면 세동리 신장부락인데 당시 초등학교를 고금국민학교를 다녔지! 고금면은 고금도라는 섬이라 해산물들이 많았고 당시 어른들이 말씀하는데 좋은 것들은 다 일본사람들이 다 가져가 버린다고 하더라. 고금도에는 그렇게 일본사람들이 많지 않았고 일본순사들 몇 사람과 초등학교 교사로 몇 사람이 와있었지! 내가 기억하는 것은 당시 국민학교 일본선생님이 학교를 파하면 내 손을 잡고 집에 가는 길을 저만치 데려다 주었지! 아직도 선생님의 손길이 기억이 나!

 

아 들 : 보통 우리가 일제하에 한국에 온 일본사람들은 다 나쁜 놈들이라고 생각했는데 꼭 그것만은 아니었네요! 혹 그 선생님 이름을 기억하세요? 아부지! 저는 칠량국민학교를 다녔는데 다른 선생님들 존함은 다 잊어버렸는데 1 학년 때 담임이셨던 선생님 함 자가 박 정 자 연 자 박정연 선생님이었거든요! 선생님은 절 이쁘게 보셨는지 태진아! 교무실에서 백묵 좀 가져오니라! 하시면 잽싸게 숨도 안쉬고 달려가서 백묵통을 가져와서 선생님! 가져왔는데요! 하면은 선생님은 우리 태진이가 빠르기도 하지! 하면서 머리를 쓰다듬어 주신 것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아부지도 그러신거지요? 사람은 사랑받은 만큼 기억하는 것 같아요!

 

아버지 : 니 말대로 일본사람들이라고 해서 다 나쁜 사람들만이 아니었지! 참 좋은 분들도 적지 않았지! 그 선생님 존함이 와다나베 쇼이찌야! 내가 교단 부총회장을 할 때 서정래 교단총무와 함께 일본에 갔을 때 호텔에 있는 전화번호부에서 선생님 이름을 찾아보았는데 동명이인들이 백명이 넘어서 찾기를 포기했었지! 물론 돌아가셨겠지만 다시 만나 뵈옵고 싶어!

 

효촌과 부친 배상우 집사

 

아 들 : 아부지! <벤자민 버튼의 시계는 거꾸러 간다> 영화가 있거든요! 그 영화에서 주인공은 나이를 거꾸러 먹어요! 그래서 점점 나이가 더 어려지게 되죠! 그럴 수는 없겠지만 아부지가 세월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면 그래서 어린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누굴 젤 만나고 싶으세요?

아버지 : 느그 할아버지 배상우 집사님이다.

 

아 들 : 왜요?

 

아버지 : 글쎄 느그 할아버지는 내가 목사가 되어 이제 본격적으로 효도할만한 때에 가셨다. 그러니까 환갑상도 받아보지 못하시고 가셨어! 너도 내 속을 참 많이 썩게 했지만 나도 아버지 속을 많이 썩혀 드렸지! 생각하면 할수록 후회가 막심하다!

 

아 들 : 할아버지가 환갑도 안되어 돌아가셨다면 무슨 지병이 있으셨어요?

 

아버지 : 아버지는 췌장암으로 가셨지! 배상우 집사님이 췌장암이 걸리실 만도 했다. 6.25 때 인민군들이 쳐들어왔을 때 좌익들은 인민군의 도움을 받아 우익들을 많이 죽였지! 그때 인민군들이 너네 할아버지도 잡아서 묶어 놓았는데 당시 칠량에 있었던 좌익들이 인민군들 한테 배상우 동무는 공산당이 아니면서도 공산당보다도 더 많이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눠준 사람이다고 변호해 줘서 살아났지! 당시 풀어준 인민군이 할아버지의 농삿일과 노동으로 갈라진 손을 보고 이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프로레타리아라고 하였대더라!

아 들 : 아부지! 그 얘기를 들으니까 아부지가 기장 총회장으로 계실 때 당시 향린교회 홍근수 목사님과 만나 이야기를 하시던 중에 그런 얘기를 나누셨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그때 아부지가 홍 목사님에게 말씀하신 것 중에 기억하고 있는 것 하나가 있습니다. “내가 군목으로 28 년간 일하면서 수도 없이 반공강연을 해왔는데 홍 목사님 얘기와 주장을 들어보니까 빨갱이 중의 정말 빨갱이인데 그런 빨갱이라면 참 좋다고 느껴진다!” 저는 그때 하신 그 말씀과 한 인민군이 할아버지에게 한 말이 서로 겹쳐지는데요! 할아버지는 공산주의자는 아니었지만 공산정신 나눔정신에 철저하게 사신 분 아닙니까? 근데 할아버지가 원래 착하셔서 그렇게 잘 나누신 것예요 아니면 할아버지가 예수님을 믿으셨기에 그렇게 잘 나누신 거예요?

 

아버지 : 둘 다지! 느네 할아버지는 성정이 참으로 선하신 분이었는데 예수님을 알고 난 다음에 예수님을 닮으려고 애를 쓰셨고 성경말씀에 있는 대로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들을 돌보는 일을 잘하셨지! 나는 말씀을 전하는 목사이고 그 분은 그저 집사님이었지만 참으로 예수님의 정신과 말씀에 순종하며 사신 것을 생각하면 목사인 내가 가르침을 받고 고개가 절로 숙여질 때가 많았다!.

 

아 들 : 제가 돌아가시기 전 할머니에게 그런 얘기를 숱하게 들었거든요! 할아버지가 새벽기도를 가기 전 밤새 새끼를 꼬아서 짚신을 삼아 그것을 보리쌀 부대와 함께 과부집 마당에 몰래 떨어뜨려 놓고 가시고 떠돌이들이 오면 비록 집안식구들은 못 먹는다 하더라도 따뜻한 밥을 지어 주고 잘 재워 보내셨다고 숱하게 들었습니다. 할아버지 존함이 배 상 자 우 자 이신데 한문으로는 어떻게 되요?

 

아버지 : 상 자는 서로 상() 자고 우 자는 도울 우() 자 해서 서로 돕는다 그런 뜻인데 가만히 보니 이미 이름 속에 서로 돕는다는 의미가 담겨 있구나!

 

아 들 : 아부지! 할아버지는 언제 태어나셨어요?

 

아버지 : 1900 1 1 일 새벽에 태어나셨다. 그러고 보면 20 세기를 여는 새 아침에 나신 것이지!

아 들 : 그러면 아부지처럼 주민등록을 늦게 하셨나요?

 

아버지 : 그렇다! 실제로 태어나신 날자와 등록된 날자는 다르지!

아 들 : 아부지! 저는 할아버지에 대하여 묻고 싶은 것이 참 많은데요. 알렉스 헤일리 라는 작가가 뿌리라는 소설을 써서 선풍적 인기를 끌었죠! 미국에 있는 흑인들의 뿌리의 역사를 아프리카로 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방식을 택했죠! 우리 배씨 집안의 뿌리에 대하여 알고 싶은데 역사적으로 추적 가능한 곳이 어디서부터 처음 배씨가 시작되는 지점입니까?

 

효촌의 조상 - 원 시조 지타

 

아버지 : 우리 배씨의 조상은 신라 박혁거세 당시 일곱 족장 중의 하나였던 분이 지타라는 분인데 박혁거세를 도와 신라를 창업하신 분이지!

 

아 들 : 아부지가 우리 조상의 시조라 해서 제가 인터넷 위키백과사전에 검색해 보았습니다. 우리 조상의 원시조인 지타씨는 신라의 전신인 금산(금산)의 가리촌의 촌장으로 하늘에서 명활산(명활산)으로 내려 왔다고 합니다. 박혁거세를 신라의 초대왕으로 추대하여 신라 태조 3 (서기 55 )에 공신(공신)의 위차(위차)를 정할 개국좌명1등원훈 총재태사(개국좌명1등원훈 총재태사)에 이르렀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신라 유리왕 9 (서기 32 )에는 신라개국의 공을 참작하여 심라 6 부 촌장에게 마을 이름과 성이 내려졌습니다. 금산가리촌은 한지부(지금의 경주)가 됐고 배씨(裵氏) 성을 사성받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경주 배씨가 우리의 본래의 뿌리가 되겠네요?

아버지 : 그렇지! 경주 배씨에서 나중에 분성(分姓)이 되어 분성(盆姓) 배씨, 성산(星山) 배씨와 달성(達城) 배씨로 분파(分派)되었고 두 번째 파조(派祖)인 성산 배씨(星山)가 우리 가문이다.

 

아 들 : 아부지! 우리 조상 중 한 분이 6 부 촌장의 한 분으로 신라의 박혁거세를 왕으로 추존하였고 박혁거세는 알에서 낳았다고 전해지는데 그것을 믿으세요?

 

아버지 : 뭐 정말 알에서 낳았겠냐? 나는 창세기 1 장의 말씀을 믿는다! 인류의 조상은 하나고 모두가 아담과 이브에게서 나온 후손들임을 믿는다. 아마도 신라의 후대에서 우리 조상은 특별한 유래를 갖는다 하여 알에서 낳았다고 누군가 얘기를 그렇게 만든 거겠지! 하나님은 인간을 알에서 까도록 만들지 않으셨다!

아 들 : 아부지! 저와 아부지는 호남사람인 줄로만 알았는데 그리고 백제의 후손인줄로만 알았는데 원시조인 지타씨가 금산 가리촌 즉 경주에 있으니 영남에 그 뿌리가 있는거군요!

 

효촌의 성씨 배() 씨의 시작

 

아버지 : 그렇지! 너도 경남 마산에서 태어났으니 출생은 영남이고 낳아서 산 곳은 강진 칠량이니 호남사람이고..... 이 메뚜기 이마빡보다도 더 좁은 땅덩어리에서 영남과 호남을 나눈들 뭐가 좋겠느냐? 그것은 과거의 정치인들이 자신들이 권력을 차지하고자 이렇게 금을 긋고 저렇게 금을 긋다가 생긴 건데! 이제 너 세대에서는 지우개를 가지고 다니면서 그어진 금을 지워야 할게다!

 

아 들 : 남북으로 그어진 금도 지워야 하겠죠!

 

아버지 : 그렇다마다! 6.25는 북한 김일성이 일으킨 것인데 그 사람도 가고 그 사람 아들도 갔으니 이제는 증오를 내려놓고 이제는 찢을 때가 아니라 꿰멜 때다! 박근혜 대통령 손에 지우개가 들려져서 남북간의 그어진 금을 잘 지워나가면 좋겠구나! 개성공단도 잘 풀리면 좋겠고!!

 

효촌의 조부에 대한 회상 - 배대연(裵大淵)

 

아 들 : 동감입니다. 아부지! 다시 뿌리로 돌아가서 할아버지의 아버지 그리고 그 아버지의 아버지는 어떻게 되시죠?

 

아버지 : 니가 이 애비가 만들어 놓은 족보를 잘 보고 파악을 했으면 좋겠다! 할아버지의 아버지는 배 대() 자 연() 자시다. 그리고....

 

아 들 : 아부지! 잠깐만요! 배 대() 자 연() 자씨가 저에게는 증조할아버지가 되는 셈인데 그 분이 혹 할머니가 그러시는데 술을 많이 잡수셨다는 분 아닙니까?

 

아버지 : 맞다! 술을 무척 좋아하셔서 본가(本家), 처가(妻家), 외가(外家)의 재산을 술로 다 훌훌 다 마시셨지! 그 분이 마신 술의 양을 재어본다면 강진의 탐진강의 흐르는 물을 채울 수 있을게다.

아 들 : 정말 허벌나게 많이 드셨구만요! 저도 아버지 신학교 다닐 시절에 술을 많이 마셔보았거든요! 근데 같이 마시던 친구들은 다 나가 떨어지는데 저만 말똥말똥 한거예요! 친구들은 너 엄청 술이 쎄다고 하는데 왜 내가 술이 그렇게 센지 몰랐는데 그게 예전에 증조 할아버지의 유전자를 받아서 그런게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증조께서 술을 드시고 노래만 부르셨다면 외가 처가 본가의 재산을 다 거덜나지 않았겠죠!! 예전 할머니 말씀을 생각해 보면 술 드시면 기분이 좋아지셔서 그냥 막 퍼주셨다고 하던데요!

아버지 : 그래 그랬다. 술이 많이 들어가시고 기분이 좋으시면 이 사람 저 사람 다 불러서 술잔도 돌리시고 집안에 있는 쌀이나 곡식들도 나눠주곤 하셨지!

 

아 들 : 할아버지가 그렇게 나눠주기를 즐겨하시고 아버지도 그동안 많이 베푸셨잖아요? 혹시 그것도 증조부께서 나눠주기를 좋아하셨던 유전자가 전해진 것이라고 봐도 될 것 같은데 아부지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아버지 : 그도 그럴 것 같구나!

 

효촌의 증조부, 고조부에 대한 회상

 

아 들 : 아부지의 증조할아버지와 고조 할아버지를 그 이상을 보신 적이 있으셨습니까?

 

아버지 : 지난번 고금도에 갔을 때 너에게는 고조부가 되시는 배 종 자 팔 자씨의 묘소를 보고 눈물이 났었다. 후손들이 선친들을 잘 모셔야 하는데...... 너에게는 6 대조이신 배 환 자 규 자 되시는 분의 묘소는 자손들이 많이 있어 묘소관리가 잘 되어있더라마는 5 대조이신 배 종 자 팔 자씨는 너에게는 고조부가 되시겠지만 나중에 양자를 가서 그런지 묘소를 돌보는 사람이 없구나! 나중에 고금도에서 강진 칠량 할아버지 묘소 위에다 이장을 할 터이니 준비를 해 놓거라!

효촌의 중시조 - 배현경, 배극렴

 

아 들 : ! 아부지! 우리 집 배씨의 성씨가 성산(星山) 배씨인데 우리 집 족보에 보면 배 현 자 경 자 되시는 시조가 나옵니다. 배현경 시조께서 당시 복지겸, 홍유, 신숭겸 장군과 함께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창건하셨는데 이 분이 경주 배씨의 시조이십니까?

 

아버지 : 아니다. 박혁거세를 옹립하여 신라를 건설한 한 분이신 지타 할아버지가 시조이시지만 경주 배씨의 세대(世代)는 고려개국공신이신 배현경(裵玄慶) 할아버지가 경주 배씨의 제 1 세이시고 6 세손 원용(元龍 - 盆城), 천룡(天龍- 星山), 운룡(雲龍 達成) 이 세 분에 의해 분성 배씨, 성산 배씨, 달성 배씨로 분파(分派)되어 이 세 분이 파조(派祖)가 되는 셈이지! 그때 파조개념은 벼슬에 따라 결정되었으므로 혹자는 제 8 세이신 위준(位俊) 할아버지를 성산 배씨의 파조로 말하는 분도 있단다. 사실 제 14 세손 극렴(克廉- 貞節公) 할아버지는 이씨조선 초대왕 이성계를 도와 나중에 이조개국공신 영의정까지 지내셨기 때문에 정절공 가문에서는 벼슬이 제일 높은 분이셨지! 이 분을 성산 배씨 파조 또는 우리 가문의 파조이시기도 하단다. 정절공은 조선조 태조 이성계의 개국공신으로 나중에 나중에 영의정 오늘로 말하면 국무총리를 역임하셨으므로 이조 개국일등공신이시었고 나는 경주 배씨 무열공 34 세손이고 너는 무열공 35 세손이고 네 아들 신철이는 36 세손이란다.

 

아 들 : 아부지! 우리 조상의 내력을 보니까 지타 선조는 박혁거세를 도와 신라를 개국하였고 고려시대에는 배현경 선조께서 개국일등공신으로 조선시대에는 배극렴 선조께서 개국일등공신으로 활동하셨는데 한편으로는 자랑스러운 선조라는 뿌듯함이 있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배현경 선조와 배극렴 선조께서는 반역을 한 것인데 이 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아버지 : 그 시대를 가보지 않아서 모르겠다만 역사 속에도 있지 않으냐? 궁예가 너무 포악하여 당시 백성들과 관리들을 많이 죽이다 보니까 백성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왕을 바꾼 것이라 생각한다. 왕이 선정을 베풀지 못하고 백성들을 굶주리게 하고 외적에게 침략당하게 하는 그런 약한 왕이라면 갈아야 하지 않겠느냐? 왕이란 백성을 위해 있는 법인데 백성들을 위하지 못하고 지 한 몸 간수하는데 그친다면 무슨 왕이라 하겠느냐? 대통령이나 정권도 형편없이 하면 선거에 의하여 교체하지 않니?

아 들 : 아부지의 그 논리는 맹자의 왕도정치 사상에 나오는데요! 왕이 정치를 개판으로 하면 역성혁명을 일으키는 것을 정당화합니다. 그런데 박정희 전 대통령도 유신을 하고 독재정치를 하고 사람을 많이 죽이다 보니까 결국 부하에 의해 죽게 되었습니다. 왕이나 대통령이나 국민을 위하거나 백성을 위하지 않으면 그렇게 처참하게 물러나게 되죠! 그래도 우리 조상이 힘있는 자의 편에 서서 기존의 정권을 무너뜨리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은 그렇게 썩 기분은 좋지 않습니다.

 

아버지 : 내가 너를 낳았지! 니 생각을 낳은 것은 아니지 않느냐? 나는 너의 생각에 동의는 하지 않는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물론 독재정치를 했어도 이 나라를 가난에서 구해낸 국부와 같은 존재였다. 박 대통령 때문에 그래도 우리나라가 오늘 이만큼 사는 것도 그 분의 덕이다.

 

아 들 : 아버지! 저는 박정희가 아니더라도 훌륭한 지도자가 그 시대에 나라를 맡았다면 민주화와 산업화를 동시에 잘 이루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애국가에 있잖아요?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하나님께서 이 땅 이 백성을 사랑하셔서 삼천리반도 금수강산 보우해 주셔서 그렇게 되었지 저는 박정희 전 대통령 때문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아버지 : 거시적으로 보면 물론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가 잘되었다고 생각하지만 미시적으로는 박정희 전 대통령도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

 

효촌의 어머니 - 김중엽 권사

 

아 들 : 할머니가 96 세로 소천하셨지만 저는 어려서 할머니 영향을 많이 받고 자랐습니다. 할머니는 할아버지 얘기도 많이 하시고 아버지 얘기도 많이 하셨는데 아버지의 할머니에 대한 추억을 말씀해 주시죠!

아버지 : 참으로 인자하신 분이었어! 초등학교도 나오지 않으셨지만 믿음생활은 철저하게 하신 분이었지!

 

효촌의 학창시절 - 칠량초등학교

 

아 들 : 언젠가 제가 아버지 칠량초등학교 성적표를 본 적이 있었는데요! 당시는 갑(), (), (), ()으로 성적을 매긴 것 같아요! 그런데 일학년 때부터 졸업할 때까지 갑(), (), () 온통 다 갑만 있었는데 왜 그렇게 공부를 잘하셨지요?

 

아버지 : 내가 물론 공부를 잘한 것도 있었지만 내가 고금도에서 초등학교를 일학년과 이학년을 다니다가 다시 칠량에 가서 학교를 다니려고 했는데 당시 교장 선생님이 일본 사람이라 호적나이로는 학교에서 받아줄 수가 없다고 해서 그냥 집에서 너네 할아버지를 따라 나무를 하고 다니다가 방학도 지나고 해서 3 학년 때 학교에 편입하여 들어갔기 때문에 나이가 더 들었으니 잘할 수 밖에 없었지!

 

아 들 : 그래서 3 학년 4 학년 5 학년 6 학년 성적표에 갑만 계속 있는 거에요?

 

아버지 : 그렇지! 근데 내가 어렸을 때 머리가 명석했었다. 한번 수업을 들으면 잊지를 않았으니까. 수업만 듣고 예습과 복습을 하지 않았는데 시험을 보면 100 점을 맞았지! 그것이 군대에 가서도 초등군사반(OBC), 고등군사반(OAC)에서도 언제나 1 등을 놓치지 않은거야! 하나님께서 나에게 똑똑함을 선물로 주신 거라 믿어!

 

아 들 : 아부지! 저도 칠량초등학교를 3 학년까지 다녔으니까 아부지와 초등학교 동창인 셈인데 아부지는 반장을 해 보신 적이 있으세요? 저는 초등학교를 세 개를 다녔습니다. 칠량초등학교 원주일산초등학교 광주학강초등학교 그런데 칠량초등학교 1 학년 때 선생님이 부분단장을 시켜 주셔서 그것이 유일한 간부경험이었는데요!

 

아버지 : 나는 칠량초등학교 시절에 4 학년 5 학년 두 번에 걸쳐서 반장을 했던 기억이 있다. 아마도 내가 나이도 많았던 것도 있었고 통솔력도 꽤 있었다.

 

효촌의 즐거운 유년시절

 

아 들 : 아부지! 제가 누군지 밝힐 수는 없지만 어렸을 때 아부지가 부잡하게 놀았다고 들었는데요! 사실입니까?

 

아버지 : 누가 말했는지 모르겠지만 어렸을 때 좀 험하게 논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게 험하지는 않았다. 기억나는 것은 호박에 말뚝박기! 자치기도 하고 구슬치기도 하고 그랬는데 고금도 앞바다에서 헤험치고 놀았다.

 

효촌과 식민지시대 그리고 해방

 

아 들 : 아부지! 그러니까 아부지가 태어나셨을 때는 이미 일제하에 있었고 아부지가 몇 학년 때 해방이 되셨나요?

 

아버지 : 중학교 1 학년 때 문태중학교 1 학년 때 해방이 되었어! 해방이 된 그 때에 사회는 무질서했고 공부는 제대로 하지 못하였지! 당시 일본사람들에게 기를 펴지 못하고 살고 있다가 해방이 되자 갑자기 권력의 공백이 생기는 바람에 참 어수선했었지! 당시에 내가 다닌 문태중학교와 목포상업학교 사이에 갈등이 져서 맨날 편쌈하고 돌아다녔어!

 

아 들 : 그때 아부지나 할아버지도 창씨개명을 하셨나요?

 

아버지 :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내 성은 호시야마(星山) 야쑈로 지어져 있었고 할아버지는 호시야마 쑈우이셨지! 해방이 된 다음에 억울하고 욕도 하곤 했지만 그 이전에는 그때 당시는 아무런 느낌없이 당연하게 받아 드린 것 같아!

 

아 들 : 해방직후에 일본사람들은 바로 일본으로 돌아갔나요?

 

아버지 : 내가 있었던 목포에서는 일본사람을 죽이는 것을 보지 못하였지만 다른 지역에서는 일본사람들을 몽둥이로 많이 때려 죽였다고 들었어! 그 사람들이 첩을 셋이나 거느리고 있었고 장사하는 일본사람들도 적지 않았는데 서둘러 일본에 간 사람들은 모를까 해방이후에도 남아 있었던 일본사람을 쳐죽인거지! 일제시대에는 그 일본사람에게 복종하고 살다가 막상 해방이 되자 오히려 일본의 개가 되었던 한국사람들이 자신의 죄를 벗고자 열심히 쳐죽이는 일에 가담했다고 생각해! 일본의 악행을 비판했다면 적어도 그렇게 하지 말았어야 했어!

 

효촌과 배상우 집사의 독립운동

 

아 들 : 아부지! 할아버지는 일제시대에 어떻셨나요? 창씨개명을 하셨는데 혹시 독립운동을 하셨는가 해서?

 

아버지 : 느그 할아버지는 독립운동을 하시다가 옥고를 치르셨다!

 

아 들 : 아니, 정말요? 그것을 어떻게 아세요?

 

아버지 : 당시 기미년 3 1 일에 만세운동을 한다는 것을 일제가 전혀 알지 못했잖느냐? 그때 열 아홉살 이셨던 할아버지는 1919 년 기미 독립만세 운동을 하였을 때 너네 할아버지는 고금도와 가교리에서 나룻배를 타고 마량만으로 건너가 육지에서 전달되는 태극기와 소식지를 받아오는 연락책임을 맡으셨다고 말씀을 들었다. 내가 듣기로는 당시 뱃사공이었던 낙연 영감님이 나에게 그런 말을 전해주었다. “느그 아버지가 그렇게 똑똑하더니 너도 그렇게 훌륭한 사람이 되거라!”라고 격려 해주더라! 그 낙연 영감은 나룻배 사공을 40 년을 했는데 고금도 사람들이 감사한 마음으로 비를 세워주었지!

 

아 들 : 할아버지가 독립운동을 해서 일경에 검거되셨어요?

 

아버지 : 검거되었는데 법원에서 징역 6 개월 언도를 받으시고 일제의 문화정책의 일환으로 집행유예로 풀려나셨지! 그에 대한 사실이 고금면의 면지 책자에 기록되어 있다.

 

참조) 여기에 관해서는 고금면지발간위원회, 고금면지(古今面紙), 301 쪽에 기록된 바는 다음과 같다.

 

배 상 우

. 신장리 출신 (자 야섭) 성산인. 1907 11 15 일생. 1965 3 17 일 별세. 1919 3.1 운동때 이현렬의 집에서 김공술, 황귀동 외 다수가 모여 태극기를 만들고 고금초등학교 앞 산 상봉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다가 일본경찰에 검거. 장흥지청에서 징역 6 월 집행유예 1 년을 선고받고 출옥후, 이현렬의 지도하에 농민운동으로 지주를 배척하고 항일운동을 적극적으로 펼쳤다.

아 들 : 그러면 우리 집안은 독립운동가의 자손이네요! 뿌듯합니다. 아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겠습니다. 아부지! 그런데 왜 분명한 사실이 있는데 국가보훈처에 할아버지를 등록하지 않으셨어요?

 

아버지 : 그렇게 해서 뭐하게! 나도 창씨개명하고 살았고 일제에 대하여 아무런 문제의식없이 독립운동에 가담하지 못하고 살았는데 독립운동가의 후손이라고 떳떳하게 나타날 수 있겠냐?

 

효촌과 배상우 집사와 복음과의 만남

 

아 들 : 아부지! 아부지는 우리 집안에 복음이 들어오게 된 것은 할아버지에게서 시작되었다고 하셨는데 처음에 어떻게 시작된 거지요?

 

아버지 : 느그 할아버지가 3.1 운동이 끝나고 난 뒤에 검기가 되고 일제의 법원으로부터 실형을 받고 난 다음 집행유예로 풀려나셨지! 그리고 할아버지는 어떤 삶의 공점을 잃고 고금도에서 목포로 가는 연락선을 타셨는데 거기서 김아열 선교사를 알게 되셨지! 영어 이름으로는 K. Allen 인데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였지! 그때 열아홉이셨어! 배 안에서 서투른 한국말로 복음을 전해 들었고 그 말씀이 뭔가 아버지의 가슴을 때리신 거야!

 

아 들 : 아부지! 그 배 속에서 김아열 선교사가 전한 복음을 전해 받고 바로 예수님을 믿게 된 것입니까?

 

아버지 : 아니다. 그때 너네 할아버지는 당시 매형이었던 고모부와 함께 있었는데 김아열 선교사가 목포에 가서 묶을 때가 없으면 선교사 사택으로 가자고 하여 따라 나서셨지! 그리고 며칠 있다가 그 고모부는 처자식이 있어 고금도로 돌아가신다고 가셨고 너네 할아버지는 선교사 사택에서 이것저것을 도와주시면서 사셨지! 그리고 거기서 복음을 알게 되었고 믿게 되었고 서양문물에도 눈을 뜨게 되셨지!

 

아 들 : 그러면 할아버지도 영어를 조금 하셨겠네요?

 

아버지 : 그렇지! 영어를 배우셨긴 하였지만 잘하신 것은 아니었고 선교사가 말하면 알아듣기는 하시는 정도였지! 어쨌든 너네 할아버지는 선교사 사택에서 성경을 배우고 읽기 시작하셨고 그 성경말씀이 들어가자 믿음이 생기셨을 거야!!

 

아 들 : 그래서 아부지! 할아버지가 다시 고금도로 돌아오셔서 고금도에 복음을 전하신 겁니까?

 

아버지 : 너네 할아버지는 목포에 같이 갔던 매형과 더불어 김아열 선교사와 고금도에 함께 가서 교회를 세우셨지! 그 매형이 자기가 살던 초가집에 방이 세 개 있었는데 방 하나는 자기가 쓰고 두 개를 터서 교회를 시작한 거야! 저번에 너와 함께 갔던 그 장소가 바로 교회를 시작했던 장소였다.

 

아 들 : 할아버지가 교회를 다녔을 때 술 많이 드셨던 증조할아버지가 허락을 하셨나요?

 

아버지 : 나는 너의 증조부가 술을 먹고 수요예배를 드리는데 쇠스랑으로 교회문을 찍어버리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아 들 : 왜 그러셨는데요?

 

아버지 : 아니 전통적으로 유교풍토에서 자라신 분이 도무지 서양 양귀자의 종교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고 애비 말을 듣지 않는다고 화풀이하신게지!

 

아 들 : 그래서 할아버지가 어떻게 하셨지요? 반항하거나 대들거나 그러지 않으셨나요? 박해가 심하여 신앙생활을 그만두셨나요?

 

아버지 : 아니다 몰래몰래 피하여 다니며 신앙생활을 하셨지! 만일 그때 너네 할아버지가 신앙생활을 하지 않으셨다면 우리 집안에 기독교가 지금 4대째 계속되었겠느냐? 내 아버지는 참으로 온유하고 겸손하신 분이었다. 한 번도 대들거나 반항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 당시 우리 집은 찢어지게 가난하여 배씨 제각에 살았는데 너네 할아버지가 할머니와 내 손을 잡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드렸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아 들 : 영국의 청교도들이 박해를 피하여 미국으로 갔듯이 배상우 할아버지가 혹시 증조부의 박해를 피하여 전남 강진으로 가신 것이 아니었습니까?

 

아버지 : 그건 아니었어!. 원래 할아버지는 강진군 칠량면에 살기도 하셨다. 할아버지의 큰 여동생의 남편이 일제에 징용을 갔는데 나중에 유골이 되어 돌아왔는데 아마도 위로도 할려고 고금도를 떠나 강진 칠량에 가서 사신 것이지!

 

아 들 : 그러면 고금도에 있는 교회는 어떻게 되었는데요?

 

아버지 : 그때 약 열 다섯 명 정도 성도들이 모였는데! 김아열 선교사가 건강이 악화되어 고국인 미국으로 떠나버리자 교회는 흐지부지되고 말았지!

 

아 들 : 할아버지가 고금도를 떠나 강진으로 가셨을 때 이미 아버지는 초등학교 2 학년을 마쳤고 그때 할아버지는 신앙생활을 계속 하셨나요?

 

아버지 : 제일 첨에는 낙담하시고 전혀 신앙생활을 하시지 않았는데 언제부터인가 칠량에서 약 8 Km 떨어진 강진읍교회에 나가기 시작하셨어! 아마도 내가 생각해 보면 목포에서 만난 고귀한 복음을 그냥 던져버릴 수 없었던 게야! 할아버지는 해방이 되기 전 5 년 전에 강진 칠량으로 가서 사셨는데 나도 잘 알지 못하던 어느 때부터 왕복 40 리의 길을 걸어 다니면서 교회를 다니셨지!

 

효촌과 출석교회 강진읍교회

아 들 : 아부지! 그러면 아부지가 초등학교 나이 때에 주일날 사십리를 걸으며 교회를 다니신 겁니까?

 

아버지 : 그렇지! 내가 아부지나 어무니 등에 업히지 않고 그냥 걸어서 강진읍교회까지 용케 잘 다녔던 것 같다.

 

아 들 : 아부지! 아부지가 강진읍교회를 다녔을 때 누가 담임목사를 하셨지요?

 

아버지 : 내가 그때 초등학교 3 학년 때였는데 배영석 목사님이셨는데 얼굴도 자주 뵈었다! 나중에 들었는데 공산군이 들어왔을 때 순교하셨다고 들었다!. 나는 그때 없었지만 너네 할아버지가 얘기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아 들 : 할아버지는 배영석 목사님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던가요?

 

아버지 : 그 분이 제일 처음 공산군이 내려올 때는 피해 가셨는데! 피해 가신 곳에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는데 목자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다하였는데 나는 양들을 두고 왔으니 삯꾼목자구나 탄식하며 다시금 강진으로 들어오셨다고 들었다. 교인들은 목사님 여기 들어오시면 공산군에 의해 죽는데 다시금 피난하게 하려고 돈을 모아 구강포에서 부산으로 피난시키려 했는데 결국 물리치시고 강진읍 시장에서 소를 파는 우시장 말뚝에 묶여 총살을 받고 돌아가셨다다고 들었다!

 

아 들 : 아부지! 제가 아부지가 다녔던 강진읍교회에 2004 2 22 일에 제 9 대 담임목사로 취임했었는데 그때 배영석 목사님의 순교를 기념하여 여러 가지 행사를 했던 것이 기억납니다. 매년 강진지역사회 속에 배영석 목사님의 순교정신을 기리며 배구대회를 했었는데요 지금도 계속해서 후임담임목회자가 계속해서 하고 있습니다. 배영석 목사님 추모예배를 드리는 가운데 지금 강진읍교회 원로장로인 김두식 장로님이 증언을 했습니다. 자신이 초등학교 때 배영석 목사님이 강진읍시장 한 가운데로 끌려가 총살을 당하기 전 묶여 있었을 때 꿇어 앉아 머리를 하늘을 향하여 찬송을 부르시던 것을 기억한다구요! 그때 불렀던 찬송이 .... 였습니다.

 

아버지 : 나도 그것을 느그 할아버지에게서 들었다.

 

아 들 : 강진읍교회는 언제까지 다니셨어요?

 

아버지 : 칠량에서 강진읍까지 8 KM 여서 너무 멀어서 안갈려구 했는데 너네 할아버지가 살살 얼려서 데리고 다녔었다. 발이 아파서 안 간다고 하면 아버지는 야 야섭아!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러 가는데 안 가면 되겠느냐말씀하셔서 따라서 한참 다녔는데 1 년이나 다녔을 것이다.

 

효촌과 출석교회 송산교회

 

아 들 : 그러다가 아부지는 송산교회로 옮기셨지요? 송산교회는 어떻게 생기게 되었지요?

 

아버지 : 강진읍교회 김성집 영수님이 계셨는데 요새로 말하자면 안수집사와 같은 레벨이지! 그 분이 원래 송산리에 사셨는데 송산은 강진읍까지 4KM 이니까 왕복 20 리를 다니신 셈이지! 그래서 김성집 영수님이 자기 집을 내 놓아 예배를 드렸는데 그것이 첨에는 기도처가 되고 나중에는 송산교회가 되었다.

 

아 들 : 그러면 아부지! 할아버지도 거기에 따라 나서신 거예요?

 

아버지 : 그렇지!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 기도처에 다니게 되어 왕복 40 리를 다니던 것이 왕복 20 리로 줄게 되었지!

 

아 들 : 그럼 아부지도 다니셨겠네요?

 

아버지 : 당시 김성집 영수님이 아들을 여웠는데 그 며느리가 주일학교 반사를 하였고 나도 목포에서 문태중학교를 다닐 때 방학 때는 와서 나도 주일학교 반사를 하였다.

 

아 들 : 그럼 초대 교역자는 누가 하셨나요?

아버지 : 초대교역자라고 할 게 누가 있었겠느냐? 김영수 영수님이 하시다가 나중에 당시 송산교회 교역자였던 김연수 전도사님이 오셨는데 그 양반이 목포에서 오셨는데 설교도 잘하시고 그래서 교회가 많이 불어나서 집에서는 드릴 수가 없어서 당시 창고를 얻어서 수리하여 교회를 했다.

 

아 들 : 아부지! 김연수 전도사님이 나중에 강진 자비원(고아원) 원장이 되었다면 혹시 강진읍교회 김안식 권사님의 아부지 아닙니까?

 

아버지 : 맞아! 그 분이 나중에 강진읍교회 장로가 되었고 고아들을 위해 강진 자비원을 만드셨지! 그 딸을 나한테 결혼을 시키려 했는데 그게 맘대로 되지 않았지!

 

배상우 집사와 칠량교회

 

아 들 : 송천교회를 다니시다가 할아버지가 칠량에 교회를 세우신 때는 언제이셨죠?

 

아버지 : 그러니까 해방되기 전 1 년 전이었으니까 1944 년일게다. 당시 너네 할아버지가 집을 바쳐셔 기도처로 시작되었는데 송산교회 김연수 전도사님이 오후에 오셔서 예배를 인도하고 가셔서 기도처로 시작된 것이 나중에 칠량교회가 되었지!

 

아 들 : 그러면 언제 정식으로 교회가 되었습니까?

 

아버지 : 그때 노회는 목포노회였는데 당시에 노회가 1947 년에 칠량교회 허가를 해주어 설립예배를 보았던 기억이 있다. 당시 강진읍교회 담임이셨던 장성철 목사님이 오셔서 설립예배를 주관해 주셨지!

 

아 들 : 1944 년부터 시작되었는데 왜 3 년이 지난 1947 년에 칠량교회가 설립예배를 보게 되었습니까?

 

아버지 : 그때 당시는 해방전과 후라 모든 것들이 무질서했다. 노회 역시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내가 언젠가 한국기독교장로회 전남노회사를 보니까 1947 년에 칠량교회가 설립인가를 받다고 기록되어 있더라!

 

아 들 : 칠량교회의 교역자들은 어떻게 계속 되나요?

 

아버지 : 제일 처음에는 느그 할아버지가 설교를 하면서 예배를 인도했고 그 다음에는 김연수 전도사님이 설교를 했고 그 다음에는 너 목포에 윤미호 목사라고 알지! 그 사람 아버지가 윤재만 목사여! 윤 목사의 고모가 양림교회 최 뭐라고 하는 집사가 있었는데 잊어버렸다. 그 전도사가 설교를 했지!

 

아 들 : 아부지! 그때 할아버지도 제일 처음에는 설교를 하셨는데 잘하셨나요?

 

아버지 : 느그 할아버지는 농사를 지어야 하니까 제일 처음 이후로는 안하셨는데 어쩌다가 전도사님이 없을 때 설교를 하시긴 하였는데 내가 들어본 중에는 할아버지 설교가 그 누구보다도 더 잘하시더라! 그것은 김아열 선교사님으로부터 가르침도 있었고 그 분이 단시 성경말씀을 강론한 것이 아니라 신앙을 생활로 하시는 분이시기에 설교가 성경적이기도 하였고 생활 속에서 깨달은 말씀의 진리를 설교하셨기에 가슴에 깊게 와 닿았지! 만일 느그 할아버지가 전도사나 목사를 하셨다면 꽤 잘하셨을 것이다.

 

아 들 : 그러면 아부지! 칠량교회에서 할아버지는 집사님이 되셨나요? 그때 당시에 서리집사와 안수집사격인 영수가 분리되어 있었습니까?

 

아버지 : 느그 할아버지는 송산교회에서 집사가 되셨다. 그리고 조사는 남장로교 선교부에서 받았지!

 

아 들 : 조사가 뭐죠?

 

아버지 : 조사란 도울 조() , 스승 사()자 인데 요새 같아서는 전도인를 말하지! 한마디로 당신은 전도할 수 있을만한 사람이라고 인정하는 것이지! 남장로교선교부에서는 김아열 선교사의 추천을 받아 느그 할아버지에게 조사의 직을 내려주신 거야!

 

아 들 : 아부지!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전답을 팔아서 칠량교회를 세웠다고 하시는데 그때 무슨 전답이 있었습니까?

 

아버지 : 느그 할아버지가 그때 칠량 사부리에 논 서너마지기가 있었는데 그것을 팔고 칠량에 뽕나무밭이 여섯마지기가 있는데 그것을 지금 칠량교회 윤장로 아버지가 사줘서 그것들을 합쳐서 영동리 동각 강당을 사가지고 <칠량교회>라 간판을 붙이고 시작했지! 교인수가 점점 불어나고 교회가 부흥하자 교회를 옮겨서 지어야 할 필요가 생겼는데 그때 느그 큰고숙인 당시 이귀연 전도사가 일할 때 동각을 뜯어서 현재 칠량교회 위치로 옮기게 되었지!

 

아 들 : 현재의 칠량교회는 어떻게 시작되었지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땀흘려 지으셨나요?

 

아버지 : 아니다. 내가 알고 있기론 그때 칠량 삼흥리에 저수지 공사를 하기 위해서 사무실을 지었는데 그 사무실의 용도가 다하여 그것을 샀고 그 건축물을 뜯어서 현 위치에 칠량교회를 지었지! 그러기 이전에 무엇보다도 칠량교회는 느그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피와 땀과 눈물의 기도가 합쳐져서 만들어진 작품이야! 물론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가 주인이시지만 할아버지와 할머니 헌신이 없었다면 마치 고금도 교회 없어지듯이 없어졌을 게야!

 

아 들 : 아부지는 칠량교회를 언제 떠나셨고 떠나셨어도 잊을 수 없었겠네요?

 

아버지 : 내가 목포로 유학하여 문태중학교를 다녔을 때 칠량교회를 떠난 셈인데 문태중학교 이후에는 목포에서 고등성경학교를 다녔고 그 뒤에는 신학교를 다녔으니 칠량을 떠나 있을 수 밖에 없었지! 그러나 내가 나중에 군목으로 갔을 때 나는 느그 엄마가 간호사를 하여 모은 돈의 십일조를 아버지가 세운 칠량교회에 보내드렸지!

 

아 들 : 그 말씀은 여기까지 하고 앞으로 아버지 군선교시절이 따로 나올 텐데 그때 가서 자세히 말씀하시죠! 그런데 칠량교회에서 그동안 목회자를 많이 배출했지요?

 

아버지 : 그렇지! 내가 알고 있는 목회자만 해도 29 명이 배출되었다. 내가 세어 보았다.

 

아 들 : 아버지! 칠량교회가 배출한 목회자들을 아버지가 기억나는 분들을 한번 말씀해 주실래요?

 

아버지 : 통합측 이귀연 목사, 기장의 배안용 목사, 김원삼 목사, 서달석 목사, 김창수 목사, 김창수 목사 아들과 동생, , 배태진 목사, 배태영 목사, 이귀연 목사 아들 이진수 목사, 이의수 목사, 예장합동측 김경식 목사 등등 헤아릴 수 없다.

 

효촌과 목포 문태중학교

 

아 들 : 아부지! 칠량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목포로 중학교를 가게 된 이야기를 해 주세요?

 

아버지 : 해방되기 전 1945 2 월달에 이제 목포로 학교를 가게 되었는데 송산교회 전도사인 김연수 전도사님이 목포에는 목포중학교가 있는데 그것은 일본사람이 세운 것이고 문태중학교는 나라를 사랑하는 애국자가 세운 학교다 문태중학교가 역사도 깊고 좋다 비록 사립학교이지만 문태중으로 가거라 해서 그 말씀에 따랐다.

 

아 들 : 그때 당시 중학교를 가려면 학비가 꽤 들었을텐데 할아버지가 학비를 정기적으로 보내주셨습니까?

 

아버지 : 아주 어려운 가운데서도 할아버지가 결단을 해서 보냈는데 어떤 때는 차비가 없어서 칠량에서 목포까지 걸어간 때도 있었다. 학비는 너네 할아버지가 대주었다. 아주 어려웠는데도 불구하고!

 

아 들 : 문태중학교를 다닐 때는 학업에 전념하셨습니까? 성적은 초등학교 시절과 같이 만 있었습니까?

 

아버지 : 공부를 잘하려고 시작했는데 당시 2 차 세계대전 중이라 사회전반이 아주 어수선했다, 그래서 당시 공부하던 분위기가 깨어져 있었고 나중에 히로시마와 나까사끼에 핵폭탄이 떨어져서 일본왕이 항복선언을 했던 시절이라 사회전반이 너무도 불확실성 속에 있어서 공부가 손에 잡히지 않았었다.

 

아 들 : 영화 친구에 보면 당시 학교가 무척 폭력적으로 묘사되었는데요 아부지도 중학교를 다닐 때 쌈을 많이 하신 걸로 아는데 제가 잘 못 들은 것입니까?

 

아버지 : 인자 해방이 되니까 휴교령이 내려서 학교를 다니지 않았는데 어느 정도 수습이 되어 그 담에 복교를 했는데 공부는 안하고 2학년이 되었다. 공부하는 풍토는 없고 맨날 폭력을 행사하는 사회가 되었다. 당시 문태중학교와 목포상업학교와 갈등이 져서 패싸움을 해! 작대기를 가져와서 유리창을 때려 부수고! 또 상업학교 학생들이 와서 문태중학교를 때려 부수고 하는 때인데 그런 싸움을 간혹 했는데 나는 그때는 중학교 5 학년제 학제였는디 쌈을 하다가 그 해에 중학교 3 년 고등학교 3 년 학제로 바뀌었다. 그러고는 그 공부는 잘 안하고 쌈만 하는 깡패학생들과 같이 몰려 다녔다. 그 담에는 쌈하는 기술이 모자라니까 권투를 배우고자 권투장에 갔는데 거기서 권투를 하는 강세철과 시합을 했는데 엄청나게 뚜드려 맞았다. 나중에 나중에 강세철의 아들은 나중에 허버트 강이라고 유명한 국가대표 권투선수가 되었다. 뚜드려 맞은 뒤에 강세철이 미워서 깡패학생들이 깡패를 함께 하자고 해서 골목마다 몰려다니면서 그 생활을 했다. 목포에 봉매각이라는 중국집이 있었다, 짜장면을 먹고 파리를 잡아서 짜장면 먹은 그릇 속에 넣고 주인을 뚜드려 팼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한심스러운 일이었다.

 

아 들 : 어거스틴도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회개하고 기독교 역사에 남는 교부가 되었잖아요! 문태중학교를 다니실 때 아부지에게 깊은 감화를 준 선생님 중에서 혹 기억나는 분이 있다면요?

 

아버지 : 문태중학교를 다닐 때는 별로 없었다.

 

아 들 : 목포에서 학교 다닐 때 주말에는 칠량으로 오셨습니까? 아니면 목포에서 교회를 다니셨나요?

 

아버지 : 목포에 있을 때는 교회를 다니지 않고 타락한 상태였지! 주일날에도 깡패하고 돌아다녔다, 길지 않고 짧게 깡패생활은 한 것 같다.

 

아 들 : 깡패생활을 접으신 어떤 계기가 있었습니까?

 

아버지 : 목포극장 건너편에 언덕받이에 YMCA가 있었다. 확성기 소리가 나서 가보았는데 프랑카드가 붙었더라. 부흥회를 하는데 그때 내 속에는 복음의 씨앗이 남았는데 아버지가 나를 위해 기도한 것, 전도사님이 나를 위해 기도한 것이 가슴에 맺혀! 딴 놈들은 보내고 올라가 보니까 홍대위 목사님이라고 대구에서 목회를 하는 목사님인데 어떻게 감동적인 설교를 하는지 꼭 내 죄를 지적하고 나는 멸망 받을 것같은 느낌을 주더라! 부흥회가 끝나고 안수기도를 해 준다고 해서 예배당 옆에 강단으로 들어가서 고백을 했다. 내가 집사의 아들이고 문태중학교를 다니고 있는데 사회가 혼란하고 그래서 깡패가 되었다는 얘기를 듣더니 내 머리에 안수를 하고 기도를 해 주시는데 바울이 다메섹에서 꺼꾸러진 것처럼 사울이 변해서 바울이 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큰 종이 된 것처럼 이 아들도 그렇게 되게 해 주십시오!” 간절히 기도를 해 주시는데 당시 온 몸이 불덩이가 되어 뜨거워져서 성령충만함을 받았다. 그 이후로 깡패생활을 접기로 했는데 그것도 쉽지 않았다. 깡패들이 인제 의리배신을 했다고 죽인다고 했는데 그것도 시간이 지나니까 해소가 되었다.

 

아 들 : 아부지! 아부지 젊었을 때를 보면 TV 탈렌트 저리 가라할 정도로 멋있게 생기셨던데 혹 중학교 다닐 때 연애경험이 있거나 아부지가 좋아했던 특별한 여학생이 있었거나 여학생이 아부지를 좋아해서 졸졸졸 따라다녔거나 한 적이 있으셨습니까?

 

아버지 : 연애 같은 것은 하지 않았다. 연애를 할 기회도 없었고!

 

아 들 : 아부지가 문태중학교를 다닐 때 쯤이면 당시 좌우익의 대립이 심할 때였는데 학교 안에서도 그런 대립이 있었습니까?

 

아버지 : 당시 그런 것을 몰랐다. 정치하는 사람들 사이에 좌우익이 많았고 학교 안에서 좌우익이 활동하는 것은 몰랐다. 중학교 시절은 비상시기였고 그런데 대한 기억은 무척 희미하다.

 

아 들 : 아부지! 청소년기를 폭풍노도의 시대라고 하고 위기의 시대라고도 하는데 아부지는 청소년기를 보내면서 당시 그 위기를 어떻게 넘기셨지요?

 

아버지 : 나의 청소년기는 위기의 시대라기 보다는 혼란의 시대였다. 1945 년 초에 중학교를 들어갔는데 그해 8 월에 해방이 되었는데 그때 일본천황이 항복한 것이 신문에 난 것을 보았는데 그때 모든 국민이 흥분을 했다. 해방된 기쁨도 있었고 일본놈들에게 다 빼앗겼는데 이제 다시 다 찾았는데 모든 것이 혼돈 속에 있어서 제대로 자리잡힌 것이 없었다.

 

효촌과 목포 고등성경학교

 

아 들 : 아부지! 중학교 3 학년이 되었을 때 상급학교 진학은 어떻게 결정하셨지요?

 

아버지 : 깡패생활을 청산하고 집에 가서 김연수 전도사님과 상담을 했는데 지금 학교가 혼란하고 그러니까 수료를 하고 전도사님이 목포에 와서 수료를 하고 문태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가지 말고 목포 양동에 있는 남장로교 선교부 안에 있는 목포고등성경학교가 있는데 신학교를 갈려면 거기에서 성경을 공부해서 가면 좋다고 해서 알고보니까 국가의 인가가 없는 학교였다. 그러나 교사들이 좋았다.

 

아 들 : 어떤 교사들이 있었는데요?

 

아버지 : 그때 당시 교사가 이남규 목사, 조승제 목사, ccc 하던 김준곤 목사, 김재석 목사 등 쟁쟁한 분들이 있었다. 거기가면 좋겠다 해서 거기를 가게 되었다. 얼마전에 김수진 목사가 써낸 목포성서신학원 60 년사에 보니까 내 기록이 나오더라! 참조해 봐라!

 

아 들 : 아부지! 그 학교에 같이 함께 다닌 분들이 누가 누가 있었습니까?

아버지 : 고등성경학교에 기장 총회장을 하던 느그 외삼촌인 윤재현 목사, 기장 회 총회장 유재천 목사, 회 총회장 김경식 목사가 다녔고 예장 합동총회장을 하였던 김길현 목사, 김인승 목사 등이 있었다. 예장통합 총회장을 하였던 박종순 목사, 염용택 목사 등등이 있었다. CCC 사무총장을 하던 장익 목사도 합동신학원 총장을 하던 한용하 목사 등도 같은 출신이다.

 

아 들 : 목포고등성경학교에서 공부하실 때 열심히 하셨습니까? 어떤 갈등 같은 것은 없었습니까?

 

아버지 : 갈등 같은 것은 없었다. 열심히 공부했었지! 학교 다니면서 성경목록를 단숨에 다 외워서 상도 받고 그랬다.

 

아 들 : 그러면 목포고등성경학교에서 기장의 총회장을 네 분이나 배출하셨군요?

 

아버지 : 윤재현 목사가 제일 먼저 총회장을 했고 그 다음에 내가 했고 그 다음에 유재천 목사가 했고 그 다음에 김경식 목사가 했으니 그러고 보니 네 분이 목포고등성경학교에서 배출했구나!

 

아 들 : 학교를 다닐 때 유재천 목사님과는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목포고등성경학교 때 학비는 누가 조달해 주었지요? 주경야독하셨습니까?

 

아버지 : 우리 집에서 한 4 킬로를 가면 유재천이 집인데 장흥군 관산군 부평리에 살았고 나와 유재천은 목포에서 공책과 비누 연필 등등 상품을 사서 칠량과 여러 동네에 가서 팔아서 그것으로 학비조달을 하곤 했다.

 

아 들 : 성경학교 때 배웠던 성경이 아부지가 나중에 목회를 할 때 유용했습니까? 기장이 진보적이라고 하는데 당시 배웠던 성경공부는 너무 보수적이 아니었습니까?

 

아버지 : 그때는 예장과 기장이 갈라지기 전이었다. 그때는 신학을 가르치기 보다는 성경 자체를 가르쳤고 당시 과목으로는 성경, 영어, 음악, 국사, 세계사 등등을 배웠다. 성경 이사야 로마서 등을 가르쳤다. 목포고등성경학교는 나중에 예장통합측에서 인수하여 목포성서신학원이 되었지!.

 

아 들 : 성경학교는 언제 졸업을 하셨습니까? 고등성경학교 교장은 누구였습니까?

 

아버지 : 6.25 나기 전 1 년 전이니까 1949 년에 졸업을 했고 교장선생님은 이근택 목사라고 오래 전에 돌아가셨다.

 

아 들 : 성경학교에 장로교 선교사들도 있었습니까? 무엇을 가르쳤지요?

 

아버지 : 미남장로교 선교사들인 조화파 선교사, 마구레이 선교사가 있었고 그분들 말고도 여럿 있었는데 기억을 못하겠다. 마구레이 선교사는 유아교육을 가르쳤던 것 같다.

 

아 들 : 아부지! 당시에 남장로교와 북장로교는 서로 갈등관계 아니었습니까?

 

아버지 : 내가 잘 모르겠다. 그러나 아는 범위 안에서 말하마! 남장로교는 보수적이고 북장로교는 상대적으로 진보적이었다고 들었다. 남장로교는 주로 남쪽에서 활동을 했고 북장로교는 한반도 중부와 북쪽에서 활동을 했다. 남장로교는 지금 예장합동측 배경이 되었고 북장로교는 통합측 배경이 되었다. 카나다선교부는 기장의 배경이 되었다.

 

아 들 : 성경학교 시절 아부지에게 깊은 영적인 영향을 주신 분은 없으셨는지요?

 

아버지 : 김재석 목사다. 양림교회 담임목사를 하다가 돌아가신 분이었는데 영어를 맛깔스럽게 잘 가르치셨다. 그 양반이 나이는 많지는 않고 우리 보다 열 살은 위일꺼야! 그 분이 가르친 영어는 다 잃어버렸지만 그 분이 가르치려 한 열정은 아직도 고슨란히 기억하고 있다,. 김준곤 목사도 성경을 가르친 선생님이었는데 날 그렇게 사랑해주셨다.

 

아 들 : 아부지! 김준곤 목사님은 나중에 대학생선교회 CCC를 만들었는데 그리고 그것이 한국교회와 한국사회에 깊은 영적인 영향력을 미쳤는데 김 목사님에 대한 추억을 말씀해 주시죠!

 

아버지 : 그 분은 그때도 영어를 잘했고 설교를 잘하셨다. 근데 몸이 아파 위장병으로 강의를 못한 때가 많이 있었다. 돌아가시기 직전까지도 성시화운동본부를 만들어서 활동을 하고 동서화합을 위해 활동을 할 때도 김준곤 목사님과 함께 한 적이 있었다. 지금 살아계셨다면 88 세나 되셨을 것이다.

 

효촌과 배상우 집사의 서원기도

 

아 들 : 아부지가 신학교를 가도록 직접 권면한 사람은 누구였습니까? 할아버지였습니까?

 

아버지 : 너네 할아버지는 내가 태어나기 전에 서원을 하여 주의 종으로 바치겠다고 서원을 했다. 우리 아들 하나님 주시면 주의 종을 만들겠다고 기도를 했지! 신학교를 가도록 권면을 한 분은 김연수 전도사님이었다. 당시 김 전도사님은 송산교회 전도사로 일하고 있었지! 성경학교로 가게 한 것도 김연수 전도사님이었고 신학교를 가게 된 것도 그 분의 도움이었다.

 

아 들 : 아부지! 할머니 얘기를 들어보니까 할아버지가 겨울에 둠벙에 들어가서 목욕재개를 하고 아버지를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서원하면서 기도하셨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아버지 : 그런 말은 들었다. 하여튼 느그 할아버지는 정결하게 살려고 노력을 하셨다. 너나 나보다도 훨씬 정결하게 살려고 노력을 하셨다. 주일날에는 물건을 사지도 않고! 둠벙에 들어가서 기도하면서 몸을 씻으시고 또 우물에서 물을 떠서 마시고 배씨 제각에 들어오셔서 호롱불을 켜 놓고 성경을 읽고 할머니 손을 잡고 기도를 드리셨는데 바로 그때도 아들을 주시면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서원기도를 한 것으로 나도 느그 할머니에게 들었다.

 

아 들 : 아부지! 목포고등성경학교 시절에 할아버지가 아부지에게 신학교를 가라고 종용하지는 않았습니까?

 

아버지 : 할아버지가 서원을 했는데 김연수 전도사님이 이를 알고 있어서 한국신학대학을 보내야 한다고 너네 할아버지에게 얘기를 해서 너네 할아버지는 전도사님의 말에 동의를 하셨다. 당시 너네 할아버지는 한국신학대학의 존재를 잘 모르고 계셨지. 그러나 자식을 주께 비치겠다고 서원한 그 서원은 변함이 없었지!

 

효촌의 아담족보와 아브라함족보론

 

아 들 : 아부지! 성경 잠언에 사람이 자기의 길을 계획한다 할지라도 그 길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말씀대로 되는 것 같아요! 물론 서원은 할아버지가 하셨지만 은총의 하나님께서 아부지를 택하셔서 정해진 주의 종의 길로 가게 하신 것 아닙니까?

 

아버지 : 나도 그렇다고 생각한다. 가만히 내 인생길을 뒤돌아보면 내가 내 길을 가는 것이 아니었던 것 같다. 주님께서 예정하신 가운데 김아열 선교사를 통해 우리 집안에 복음이 들어오게 하시고 너네 할아버지를 통해 서원을 하게 하시고 나를 점을 찍어서 주의 종의 길을 걷게 하셨다고 나는 그렇게 믿는다.

 

아 들 : 아부지! 아부지가 항상 강조하시던 성경 창세기에 있는 그대로 아담족보와 아브라함의 족보가 우리 집안에도 있는 것이지요!

 

아버지 : 그렇지! 우리 집안의 아담족보의 시조는 지타 씨지만 우리 집안의 믿음의 족보 아브라함의 족보는 배상우 집사님 바로 내 아버지이시다. 믿음이 들어온 아브라함 족보로 인해 우리 집안은 구원받았고 흥왕해 졌고 번성해졌지! 그래서 팔자를 고쳤다고 믿는다.

 

: 아부지의 생각은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의 생각과도 비슷한데요! 토인비도 세계역사 속에 기독교가 들어간 지역은 다 부강한 나라가 되었고 다스리는 민족이 되었다고 하는!

 

아버지 : 나는 토인비를 읽어보지는 못하였지만 성경에 예수님께서 내 안에 거하라 누구든지 내 안에 거하는 자는 풍성한 열매를 맺으리라하지 않았느냐? 예수님의 정신이 들어간 문명과 문화가 빛을 발하였던 역사는 서양사나 우리나라의 역사 속에서도 볼 수 있지 않느냐? 나는 우리나라가 복음을 받아드리지 않았더라면 오늘의 세계 속에 한국을 심지 못했을 것이라 본다.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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