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 설교를 수개월 동안 몇 번 해보면서 얻은 경험을 정리해봅니다.
(1) 어떤 예배에 적절한가?
아마 서양에서도 이 설교를 ’주일 대예배‘에서 하진 않을 것 같습니다. 설교자와 회중 사이의 아이 콘택트(eye contact)가 필요한 예배이지요(이 기회에 건의 하나 해야겠습니다. 뒷자리와 강단이 아주 먼, 대형 예배당이 아니라면 설교 시간에 강단 스크린에 설교자 얼굴 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설교자의 표정까지 적당하게 보이는데 그 뒤 영상에 자꾸 시선을 유인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주일오후(낮/석양/저녁)예배‘처럼 찬양이 중심인 집회에서 설교가 찬양에 ’양보‘하기 위해 낭독설교 형식을 취할 수 있습니다. 양보한 김에 원고도 길지 않은 것으로 하십시오. 개인 기도가 중심인 새벽기도회에서도 시도해볼 수 있습니다. 이미 적지 않은 교회들이 성경통독으로 낭독 중심의 기도회를 드리고 있습니다(기록된 말씀 봉독 대신 선포된 말씀을 낭독할 수 있습니다). 교역자가 아닌 성도들이 ’설교‘하는 구역기도회나 가정예배는 낭독설교가 필수입니다. 그래야 예배 준비 부담이 없고 검증된 메시지를 나눌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예배 관행을 볼 때 아직은 낭독설교를 구역기도회나 가정예배 외에는 이따금 해야할 듯합니다.
(2) 어떤 원고가 적절한가?
크게 설교자 자신이 쓴 원고와 다른 설교자가 쓴 원고로 나뉩니다.
1) 설교자 자신이 쓴 글
오래전 “개혁교단”(고유명사) 교회에서 주관하는 장례예배에 참석한 적이 있습니다. 설교자가 자신이 작성한 원고(조직신학적 내용)를 읽었습니다. 제 생각에 이런 설교를 낭독설교라고 할 수 없습니다. 낭독설교는 세팅이 낭독에 맞추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낭독설교라고 할지라도 자신의 원고를 낭독하는 것이 부자연스러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설교학자가 말하는 낭독설교 원고는 교회사에서 존경받는 설교자의 원고입니다. 이점이 매우 중요합니다.
단, 자신의 원고 일지라도 차근차근 전달하는 것이 필요한 내용이라면 낭독설교 형식을 취할 수 있습니다. 지난 토요일에 신황등교회 중보기도팀이 우리 교회를 ’심방‘하였습니다. 일일 수련회 일정 중 “예배”와 “오락회”를 우리 예배당에서 하였습니다. 오후 관광지가 정해지면 그 지역 예배당에서 오전에 예배와 오락회를 하고 그 이후 외부 활동(점심과 관광)을 한다고 합니다. 설교는 그 교회 목회자에게 맡기는데 저의 경우 구연 설교도 하고 낭독 설교도 하였습니다(설교문을 아래에 첨부합니다. 수련회 취지 중에 다른 교회 목회자들에게 설교의 기회를 제공하면서 교회와 목회자를 지원하려는 배려도 있는 듯합니다).
2) 다른 설교자가 쓴 글
한마디로 ’위에서 내려온 설교문‘이 좋습니다. 위에서 주어지는 권위가 실린 설교문이어야 할 것 같습니다. 교단의 경우 총회에서 내려온(제공하는) 설교문(묵상글)이고 기독교계의 경우 역사적으로 존경받는 설교자의 원고처럼 ’위에서 내려온‘ 설교문들입니다. 김재준이나 한경직, 루터나 칼뱅 같은 분들의 설교문이지요. 이 성격에 준하는 설교문이면 됩니다. 교단보다는 기독교계에서 내려온 설교문이 낭독 설교에 가장 적합하나 단점은 상당히 길어서 “낭독”에 적합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흐름을 끊지 않는 선에서 최소한의 수정을 통해 분량을 줄여도 될 것 같습니다.
(3) 기타
아주 짧은 원고라면 시각 자료(영상이나 인쇄물)가 불필요하겠지만 대부분 낭독설교에는 시각 자료 특히 인쇄물이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이것이 있을 때 긴 원고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낭독설교는 “독서가 익숙한 교인”들이 많은 교회에 맞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2.
3.
[註]
교회 작약이 피기 시작하였습니다.
기도를 방해하는 첫 번째 원인이 왠지 참신하지요? 신약학자 톰 라이트는 자신이 여기에 해당된다고 고백합니다. 제가 그동안 이것을 놓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