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본문
사무엘하 13:12-19
12 그가 그에게 대답하되 아니라 내 오라버니여 나를 욕되게 하지 말라 이런 일은 이스라엘에서 마땅히 행하지 못할 것이니 이 어리석은 일을 행하지 말라 13 내가 이 수치를 지니고 어디로 가겠느냐 너도 이스라엘에서 어리석은 자 중의 하나가 되리라 이제 청하건대 왕께 말하라 그가 나를 네게 주기를 거절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되 14 암논이 그 말을 듣지 아니하고 다말보다 힘이 세므로 억지로 그와 동침하니라 15 그리하고 암논이 그를 심히 미워하니 이제 미워하는 미움이 전에 사랑하던 사랑보다 더한지라 암논이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 가라 하니 16 다말이 그에게 이르되 옳지 아니하다 나를 쫓아보내는 이 큰 악은 아까 내게 행한 그 악보다 더하다 하되 암논이 그를 듣지 아니하고 17 그가 부리는 종을 불러 이르되 이 계집을 내게서 이제 내보내고 곧 문빗장을 지르라 하니 18 암논의 하인이 그를 끌어내고 곧 문빗장을 지르니라 다말이 채색옷을 입었으니 출가하지 아니한 공주는 이런 옷으로 단장하는 법이라 19 다말이 재를 자기의 머리에 덮어쓰고 그의 채색옷을 찢고 손을 머리 위에 얹고 가서 크게 울부짖으니라
2. 묵상
옛날에 어떤 부부에게 늦둥이 딸이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병환 중 세상을 뜨자 딸은 아버지를 생각하며 절에서 백 일 동안 탑돌이를 시작했습니다. 큰스님 수발승이 이 딸을 연모하게 되었으나 중의 신분인지라 이를 표현하지 못했습니다. 여인이 불공을 마치고 돌아가자 스님은 그리움에 사무쳐 시름시름 앓다가 숨을 거두었습니다. 이듬해 봄, 스님의 무덤에 꽃이 피었는데 사람들은 사모하는 여인에게 말 한마디 건네지 못했던 스님을 닮았다 하여 이름을 상사화(相思花)라고 하였습니다.
이기적이고 폭력적인 사랑이 만연된 지금의 세태 때문일까요, 이 설화는 우리에게 진정한 사랑과 관련된 아련한 향수(鄕愁)를 일으킵니다.
같은 사랑 이야기라 할지라도 오늘 말씀에 나오는 이야기는 악몽 같은 느낌을 줍니다. 인생을 유린당한 자의 애처로운 뒷모습이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시작은 상사화 설화와 비슷했습니다. 스님 사랑에 주어진 제약이 출가자의 계율이라면 암논 사랑에 주어진 제약은 이복동생이라는 점이었습니다. 하지만 제약에 대한 태도는 달랐습니다. 스님은 계율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 사랑을 자신의 가슴에 품고 삭혔지만 암논은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암논의 폭주를 말리기 위해 다말은 성폭행 후폭풍을 경고합니다. 악하고 어리석은 행동이고 다말 자신은 치욕 속에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애원합니다. 아버지 다윗에게 허락을 받아보자는 편법까지 제시해보지만 저지할 수 없었습니다. 암논의 무도함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성경에서는 이런 경우 여성에 대한 남성의 책임감을 강조합니다. 피해자를 보호하려는 취지입니다. 하지만 암논은 다말을 오히려 가해자 취급을 합니다. 욕을 보이고 나서 갑자기 다말을 몹시 미워합니다. 상사병으로 나타난 사랑보다 더 센 강도로 미워했다고 하니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이해하기 힘든 자입니다. 다말은 이때 자신이 버려졌다는 극도의 모욕감을 느꼈을 겁니다. 더 큰 악행(16절)이라고 절규한 이유입니다.
암논은 어쩌면 소시오패스 같은 특이한 성격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암논의 모습이 평범한 우리들에게서도 아른거릴 수 있습니다. 암논에게서, 한나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이 전형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아렌트는 나찌의 유대인 학살 주범인 아돌프 아이히만에게서 일상 속에서의 무사유(無思惟) 가 사람을 악행에 젖어 들게 한다는 것을 포착합니다. 다말이 그토록 사유해볼 것을 촉구해도 암논은 생각하지 않고 악한 일을 저지릅니다.
<말씀과 삶>과 함께 신앙적 사유에 힘쓰는 우리들은 주님 보시기에 좋은 인생길을 가는 사람들입니다.
3. 기도
하나님, 주님께서 우리를 사유하는 존재로 만들어주신 의미를 생각하며 되는대로 살아가지 않고 신중하게 사유하고 진지하게 행동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