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외부에서 내려온(또는 주어진) 본문을 가지고 준비하는 설교가 ‘거룩한 수동성’으로 시작하는 설교입니다.
설교의 신앙교훈(결론)을 뒷받침하기 위해 여러 성경 말씀을 끌어오는 방식과 달리, 외부에서 주어진 본문에 설교자가 먼저 귀를 기울이는 수동성으로 설교 준비가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설교 준비 단계부터 설교가 ‘원맨쇼’ 되지 않도록 잡아주는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설교자가 성경 말씀을 ‘차출하는’ 것이 전자라면, 설교자가 성경 말씀에 ‘차출되는’ 것이 후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준비되는, 대표적인 설교는 이른바 ‘세 본문 설교’입니다. 축제력(그리스도 축일력)을 따르든, 삼위일체력(축제력에 창조절기가 들어간 교회력)을 따르든 설교자는 이 교회력에서 ‘내려온’ 본문들을 음미하여 신앙교훈을 우려냅니다.
사실, 책 한 권을 연속으로 다루는 순서설교도 이 유형에 속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본문을 정하는 과정에서 설교자의 능동성이 약간 개입되지만 크게 보면 역시 설교자에게 본문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2.
이 유형의 설교를 처음 접한 것은 약 30년 전 천주교 강론집을 통해서입니다. 제가 보기에 짧고 엉성한 설교문들이었지만, 내려오는 본문들을 가지고 준비했다는 점에 특별했습니다. 아마 거룩한 수동성이 그러한 느낌을 준 것 같습니다.
강한 인상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저는 이런 방식의 설교를 하지 못했습니다. 첫째, 과문(무지)한 탓에 이 유형의 설교가 천주교의 것이라고 여겼던 까닭입니다. 둘째, 초보 설교자 때부터 원 포인트 설교를 선호했기 때문입니다. ‘원 포인트’라는 용어도 없던 때였죠(지금도 이 성향이 강하다 보니 정서적으로는"세 본문 설교"에서 "삼 대지 설교" 느낌을 받습니다).
한 책을 순서대로 다루는 설교를 통해 거룩한 수동성을 조금 경험하고 있던 저에게 이 유형의 설교를 소개하고 안내해준 기관이 <말씀목회연구원>입니다.
일시적으로 세 본문 설교 원고도 작성해보고 주일예배 때 전하기도 했지만 설교 준비가 힘들고 회중들도 생소하게 여겨서 지금은 소강상태입니다. 찬양이 중심이 되는 <주일찬양집회>에서 교회력 본문들 중 하나를 가지고 말씀을 간단하게 새겨주고 있을 뿐입니다.
3.
본격적인 세 본문 설교는 저의 목회 현장과 잘 맞지 않는다는 생각을 핑계 삼았던 저에게 조금 변화가 생겼습니다.
지난 월요일, 수유리 교정에서 열린 "세 본문 설교" 행사를 갔다 온 후부터입니다. 전북동노회 남원순창시찰 / 임실시찰 목회자들과 동행했는데요. 내려오는 차에서 최부옥 원장님의 주제 강연을 두고 모두가 감탄을 하였습니다. 창세기 12:1-3 풀이와 그것을 다른 말씀과 연결하시는 것에 대해서요. 오랜만에 우리 교단 원로목사님들로 인해 자긍심을 느꼈고 이런 일에 관심을 가지고 충실한 목회를 위해 노력하는 동료 목회자들에 대한 존경심이 들었던 하루였습니다.
세 본문 설교에 대한 저의 태도 변화가 이것 때문은 아니고요. 계기는 두 가지인 것 같습니다. 첫째, 세 본문 설교에 대한 최부옥 목사님의 진정성과 헌신을 '새삼' 느꼈습니다. 세 본문 설교의 가치를 증명하기에 충분한 것 같습니다. 둘째, 그룹대화에서 나눈 "경험 나누기"가 요긴했습니다. 교과서적이지 않더라도 적법하게 세 본문 설교를 할 수 있는 방법이 보였다고 할까요?
[註]
1. "삼 대지 설교"를 종종 합니다. 주로 본문의 구조가 ‘삼 대지’일 경우에요.
2. 저는 수유리 교정이 남의 학교처럼 느껴집니다. 양산리를 못 벗어났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