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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절(4) - "자기의 열매로 자신을 알린다 " / 해외선교주일

최부옥 (서울동노회,양무리교회,목사) 2025-02-02 (일) 16:52 2개월전 69  

본문)  7:13~23, 6:1-8, 1:16-27

 

주현절 넷째 주일이다. 주중에 설 명절이 들어있어서, 고향 나들이에 온 국민들의 움직임이 분주한 때이다. 그런 중에 날씨도 사나워지는데, 부디 무사히 귀향과 귀갓길이 되시길 바란다.

때마침 내란의 괴수로 체포된 윤석열의 구속이 친정인 검찰의 결정으로 확정되는 바람에, 그래도 무사히 설 명절을 보내게 된 듯싶어 다행스럽다. 만일 그를 석방했다면, 이번 설 명절은 다수의 국민이 매우 불편했을 터인데-, 이렇게 결정이 났기에 천만다행이란 심정이다.

 

무엇보다도 윤석열과 전광훈을 지지하는 기독교 세력들이 한통속에 되어 있는 것이 매우 유감스럽고 통탄스럽다. 이는 무속(巫俗)신앙과 사이비(似而非) 기독교 세력이 지금 정치적으로 한통속을 이루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며, 그것도 지난 서부지법의 폭력 사태에서 보여준 바대로, 그들이 아주 무법이요 폭력 세력으로, 막무가내로 사회의 정의와 질서를 파괴하는 준동세력이 되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어쩌다 우리 한국 보수교회들이 이 정도로 타락하고 탈선했는지, 정말 통탄스럽다. 진정 옛날 아합과 이세벨 시대의 재현을 보는 듯하다.

 

마침 오늘은 총회가 제정한 해외선교(海外) 주일이기도 하다. 우리는 해외에 많이 나아가 복음을 전하며, 땅끝 선교의 사명을 묵묵히 수행하는 선교사들의 헌신과 수고를 잊을 수 없다. 우리는 당연히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후원하는 일을 중단없이 수행해야 한다. 그러면서도 그를 후원할 우리 교회의 내부를 튼튼히 하는 일도 더욱 신경을 쓰고 매진해야 하겠다. 속이 썩고 부패하면, 결코 그들을 든든히 후원할 수가 없게 되기 때문이다. 이제 정말 한국교회의 건강성을 위해 치열하게 싸우고 노력해야 할 때이다. 참 신앙과 거짓 신앙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지난 주일 말씀에서도 우리는 당시의 잘못된 신앙인들의 오류(誤謬)를 경계하신 말씀을 들었다. 남에게 말씀만 가르치고 자신은 실천하지 아니하면 하늘나라에 배제되지만, 말씀을 가르치는 대로 실천하면 하늘나라에서도 큰 자가 된다는 가르침이었다. 동시에 율법은 그 내용을 지켜 행할 때 복음이 된다는 점도 함께 확인했다. 결국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법인 율법과 복음을 지켜 행하여서, ‘회칠한 무덤같은 이중적 인격이 아니라, 그 말씀에 담겨 있는 깊은 뜻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삶으로 실천하는 선한 인격자여야 함을 다시 확인했다.

 

오늘의 세 본문 말씀도 지난 주일 말씀의 흐름을 이어가고 확대해 간다. 진리와 의 곁에서, 항상 우리를 그릇된 곳으로 떨어지게 하려는 거짓 세력들을 경계하라는 메시지가 일관되게 계속되어 나온다. 복음서에서는 거짓 선지자를 삼가라’(15)라고 경고하고 있고, 예언서에서는 예배의 제물들에서 올바른 것과 올바르지 못한 것을 구별하라’(6-8)는 점을 경계하고 있으며, 서신서에서도 주변에 있는 온갖 거짓 것에 속지 말라’(16)고 권고의 말씀을 주고 있다.

 

이런 말씀들을 접하다 보면, 우리가 예수 믿는다고 안심할 수 없고, 교회 생활한다고 해서 만족할 수 없으며, 교회 직분을 맡고 예배 열심히 드린다고 해서 모든 것이 만족해졌다고 단언할 수 없음을 확인하게 된다. 그런 일은 기초적 단계에 불과하기에, 이제는 보다 튼튼한 방패망을 쌓아두는 일과 그 속 내용을 온전한 것으로 채워 두는 일을 지속적으로 감당해야 한다. 분명한 것은 마귀들은 우리의 틈새만 보이면, 여지없이 후비고 들어와 파괴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깨어서 살아야 한다. 이런 점에서 오늘 말씀은 우리를 보다 구체적으로 일깨워 준다.

 

1. 복음서 / 7:13-23 / “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하나님 나라 복음을 본격적으로 설파하기 시작한 예수님에게는 수많은 무리가 나름대로 기대와 희망을 품고 예수님을 좇기 시작했다. 하지만 주님은 따르는 그들을 기뻐하시기보다는, 그들이 진정 어떤 인물이 되어야 할지에 대한 관심을 더욱 깊이 가지시면서, 그들을 올바른 존재로 세우시려는 말씀을 집중해 주셨다. 그 점을 생각하면서 선포하신 제 일성은 바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라는 요구였다(13).

 

그 이유로는 멸망으로 인도하신 문은 크고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으나, 생명으로 인도하신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기 때문이라 하셨다(14). 이런 예수님의 구별과 진단은 이미 당시에도 거짓 선지자들의 준동(蠢動)에 의하여, 적잖은 이들이 그들을 쫓아다니며 인생을 망가뜨리고 있는 현상이 있었음 보시면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었다. 곧 문은 두 가지인데, 멸망과 파멸로 인도하는 문과 생명과 구원으로 인도하는 문이 있음을 알리시고, 그 대신 그 구별은 절대로 외모나 수량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님도 더욱 유념하라고 권하셨다.

 

그러면 거짓 선지자의 특성이 무엇인가? 두드러진 특성은 겉과 속이 다르다는 점이다. 소위 양두구육(羊頭狗肉)의 모습으로, 겉은 양의 모습으로 나오지만 속은 노략질하는 이리라는 것이다(15). 그러면 그 겉과 속의 다름을 어떻게 찾아낼 것인가? 그 점에서 주님은 열매론()을 제기하신다. 곧 그들이 맺은 삶의 열매가 그들을 알게 한다는 것이다(16,20). 예컨대,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딸 수 없음과 같고, 좋은 나무에서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나쁜 나무에서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음과 같다는 논리였다(17-18). 나쁜 열매만을 생산하는 나무의 운명은 결국 찍혀 불에 던져질 뿐임을 지적하셨다(19).

 

그와 함께 예수님은 보다 구체적으로 좋은 나무 인생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자의 특징도 적시(摘示)하며 말씀하셨다. 그 사람은 당신을 향하여 주여, 주여하며 부르는 자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이라는 점을 지적하셨다(21). 그러면 당신을 향해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은 어떤 자들인가? 놀랍게도, 그들은 평소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귀신도 쫓아내며, 많은 권능을 행한 자들이었다(22).

 

그런데도 그들은 그토록 주의 이름을 내세워 놀라운 기적들을 행하면서도, 대체 무엇이 문제가 되어서, 결국엔 주님의 책망만을 듣고 내침을 받게 된 것일까? 주님의 책망 속에 바로 그 원인이 들어있다. 그들은 주의 이름을 빌려서 굉장한 일들을 하긴 하였으나, 그 내용으로는 주님의 뜻과 마음을 헤아려서 얻어낸 것은 전혀 아니었기 때문이다. 결국은 자기 자랑뿐이었다. 그런 실정이기에, 주님은 그들에게 이토록 냉정하게 외면하셨다.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不法)을 행한 자들아 --’(23). 이들의 문제는 말씀을 좇은 삶이 아니었다.

 

2. 예언서 / 6:1-8 / “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선지자 미가는 북 왕국 사마리아가 앗수르에게 B,C 722년에 망하는 것을 목격한 선지자였다. 그는 선지자 아모스와 함께, 참을 수 없이 불의해진 사회 상황을 상대로 강하게 비판하였다. 그러면서 가식으로 변절해 버린 잘못된 예배에 대하여 준엄하게 비판했다. 그의 눈에는 예루살렘 지도층 사람들, 특히 왕실 사람들과 종교 지도자들이 제구실 못 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서, 사정없이 예루살렘과 성전의 종말을 예고하였다(3:12, 6:9-16 참조).

 

미가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백성들에게 따져 묻는다. 여호와는 여태껏 변함없이 그의 백성들에게 신실하셨고 괴롭힌 적도 없었는데도-, 그의 백성들은 왜 그렇게까지 여호와께 올바르게 서지 못하고 타락하고 변질되었는지, 그래서 여호와를 향한 예배와 신앙의 행위가 어찌 그토록 어긋났는지를 따지듯 되묻는다(1-5). 부디 그들에게 행하신 여호와의 은혜로우신 일들을 기억하라며 권한다. 그러면 금방 여호와가 자기들에게 행하신 공의로우심을 알 것이라고 했다.

 

문제는 그들의 여호와를 향한 예배자의 삶이 어긋나 있다는 점이다. 예배 자체가 없는 것이 아니라, 방향이 잘못 잡혀 있다는 데 있다. 그들 생각은 온통 하나님은 제물로써 만족시킬 수 있는 신이라는 생각에만 몰두해 있고, 그러기에 그들에게는 하나님이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하여서는 전혀 괘념치 않았고, 오직 자기들 입장만 고집하고 살았다(6-7).

 

그들이 늘 관심하는 일은, ‘하나님이 자기들에게서 받고 싶어 하시는 제물이 무엇이냐라는 생각이었다(6-7). 일 년 된 수송아지일까, 수천 마리의 양이나 수만의 강줄기를 채울 올리브기름일까, 아니면 혹 자신들의 허물을 씻어줄 것을 위하여 자기 맏아들이라도 바쳐야 하는 것일까 라는 등등의 제물 바치기에 몰두했고, 그렇게 해서라도 자신들이 어떤 복을 받을 것이냐는 점에 전념했다. 이런 모습만 보면, 그들의 신앙이 매우 뜨거운 듯싶지만, 사실은 신앙 전체의 건강성은 이미 이웃 사랑이 없는 기복(祈福)주의 중심으로 무너져 있었다.

 

사실 여호와께서는 일찍이 그들에게 당신이 진정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밝혀주신 바가 있었다(8, 10:12, 삼상15:22, 123:2,130:5-6 참조). 그런데도 그들은 그 중요한 사실을 잊고, 마냥 물질 위주와 기복 위주의 예배에만 매달렸다. 그 바람에 그들은 생활 전반에서의 주님이신 여호와가 아니라, 예배만 받으시는 성전 중심의 여호와만을 생각하는 편파적 신관에 매몰되어 살게 된 것이다. 이는 세상과 우주 만물의 주되신 이를 인간이 만든 좁은 예배당에 가두어 두는 우()를 범한 것이다. 신앙을 삶과 예배를 하나로 묶어진 일원론적 신앙이어야 하는데, ‘삶 따로, 예배 따로의 이원론적 신앙으로 전락시켰다. 그러기에 성전에서만 의인이었고, 세상에서는 불의를 행하고 이기주의자로서의 타락한 범죄자로 살았다.

 

바로 이런 문제 때문에, 이 세상에 오신 예수께서는 처음부터 당신의 제자들에게 단호히 세상 중심의 정체성을 심어주신 것이다(5:13-14 /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다). 즉 세상과 이웃을 잃어버린 신앙인은 참 당신의 제자일 수 없음을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기에 미가는 여호와께서 진정 그들에게 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다시 깨우쳐 준다.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正義)를 행하며. 인자(仁慈)를 사랑하며, 겸손(謙遜)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8).

 

이게 무슨 말씀인가? 세상과 이웃에게 범죄하며 욕을 먹고 사는 자는 여호와 하나님 앞에 합당하지 않다는 말씀이고, 이웃에게 긍휼과 자비를 베풀지 않는 자도 하나님께 합당하지 않는 자이며, 하나님 앞에 언제나 겸손한 마음으로 주의 뜻에 순종하며 받들어 사는 자가 아니면 그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고 선언했다. 하나님께 드릴 제물은 그런 올바른 삶을 바탕으로 드려야 비로소 기꺼이 받으신다는 것이 된다. 마치 아벨과 그 제물을 받으시듯 하신다(4:4).

 

3. 서신서 / 1:16-27 / “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예수님의 아우이자 교회의 지도자였던 야고보는 교회 성도들의 신앙의 건강성을 보전하기 위한 필요한 지침(指針)들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여 준다.

 

1) 야고보는 믿음의 성도들에게 요구한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16). 뭘 속지 말라는 것인가? 자기들이 시험받을 때,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고 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한다. 까닭은 하나님은 시험받거나 시험하지도 아니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13). 그보다는 사람이 시험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 당하기 때문임을 일깨운다(14).

 

2) 그보다는 자기가 누구인지를 먼저 헤아리는 일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당신의 뜻에 따라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을 내려주시면서, 동시에 진리의 말씀을 주셔서 우리를 낳으셨기 때문이다(17-18). 이 말씀은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길을 걷도록 부르심을 받은 존재라는 사실을 명심하게 하는 내용이다.

 

3) 따라서 우리 성도들이 갖추어야 할 신앙 윤리는 존중되어야 한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와 성내기는 더디어야 한다(19). 특히 성내기는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을 명심해야 한다(20). 이와 함께 우리는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어야 하고, 우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마음에 심어진 말씀은 언제나 온유함으로 받아야 한다(21).

 

4)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22).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거울로 자기의 얼굴을 보고도 자기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곧 잊어버린 자와 같다(23-24). 이 얼마나 허망한 모습인가? 하지만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자는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는다(25).

 

5) 자기를 경건(敬虔)하다고 생각하는 자가 자기 혀에 재갈을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그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 같은 사회적 약자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다(26-27). 이 말씀 역시 진정한 경건은 가벼운 입놀림에 있지 아니하고, 도리어 어려운 사회적 약자들과 힘없는 이웃들을 돌보는 사회적 영성(靈性)에 있음을 일깨워 준다.

 

o 지금은 거짓 영이 득세하는 시대이다. 이제 우리의 신앙의 실체에 대한 점검이 필요하다. 외형적인 경건이나 형식적인 예배자의 수준에 머무르지 아니하고, 내가 진정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며 살고 있는지를 우선 성찰하는 일이 시급하다. 신앙의 연륜과 관록만으로는 내 신앙이 구원받을 수준에 들어간 것인지를 확증하기 쉽지 않다. 그보다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를 묻고 답하는 수준에 이르러야 하겠다.

 

물론 여호와를 진정으로 예배하며 경배하는 삶은 절대적으로 준수되어야 한다. 하지만 나의 신앙의 수준은 이웃 사랑, 특히 하나님께서 항상 긍휼히 여기시는 사회적 약자들을 향해서도 관심과 자비를 베풀고 나누는 사랑 수준에까지 확고히 자리해야 한다. 그게 바로 아브라함 자손의 신앙의 실체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우리는 말씀을 듣기도 잘하고, 행함도 확실한 성도가 되어야 하겠다. 그래서 여호와의 복이 내 삶에서 끊어지지 않고 이어가게 해야만 하겠다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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