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년 목회를 마무리 하면서 농촌목회 (덕촌교회)를
회고해 보았던 추억을 여기에 담아 보았습니다.
1976년 5월 40여명이 모였던 농촌교회로 부임한것이
바로 충북 덕촌교회였습니다.
당시에는 일년에 100만 명씩 이농 현상이 일어나는 때
였으므로 도시에서 교회를 개척하면 3년이면 자립을
하는데 농촌교회는 아무리 노력해도 부흥하기가 어려웠
습니다.
부임해서 가을 신앙부흥회를 개최하고 마을 리장 집을
찾아가서 부락 방송으로 우리 마을에 훌륭한 강사님을
모시고 교회에서 신앙부흥회를 가지오니 많이 참석해
달라고 방송을 하고 전단지를 만들어 집집마다 집회
소식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놀란 것은 부흥회에 단 한 사람도 주민들이 참석
하지 아니했다는 것입니다.
충격을 받고 이유가 무엇일까? 고민해 보았습니다.
60여년 교회의 역사 가운데 주민들은 교회에 안 다녀
본사람도 없고 교회에 대하여 모르는 것도 없었고 또한
신자는 거룩한 백성, 불 신자는 지옥 갈 백성 음주하고
안 하고, 제사 지내고 안 지내고, 교회와 부락 주민들
간의 보이지 않는 막힌 담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런 농촌 현장에서 나의 젊음을 어떻게 목회에 헌신할
수 있을까? 고민하며 기도하는 가운데 결심했습니다.
40 명 모이는 교회의 목사만이 아니라 이 마을에 목사
그리고 농민을 위한 목사로서 목회 사역에 힘쓰기로
다짐을 했습니다.
그래서 주민들을 위해 예배당을 개방하는 프로그램을
실시하기로 계획을 세웠습니다.
예배당 문을 열고 나무 의자를 치우고 마루를 깔고
농번기 탁아소를 시작했고 이때 기장 여신도 전국연합
회에서 간식을 제공해 주어 감사했고
자모들과 소통하며 계절 학교와 자녀교육. 고부 갈등
문제 해결, 등등 열린 모임을 가졌고
(지금은 그 자모들이 덕촌교회 중진들이 됨)
그리고 추수감사절이면 영농좌담회를 개최하여
(3일 연속 저녁시간) 전국에서 농산물 성공사례자를
초청하여 발표하고 카농에서 쌀생산비 보고 대회를
가지는 영농좌담회에 예배당에 앉을 자리가 없이 자발
적으로 부락 주민들이 참석하는데 놀라게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더욱 농민들이 필요한 것에 교회가 섬기는 일
을 추진하여 모내기 공동작업반,기계협동반,
축산협동반, 조직하여 생산비를 절감하고 유통과정에
비용을 절감 하는데도 노력을 했습니다.
당시 조직한 축산협동반으로 축산농가가 늘어났습니다.
또한 완두콩 공동판매와 한가위 축제도 함께 했습니다.
배추 파동에는 배추값 시위, 소값 파동에는 청주 우시장
에 나가 전단지를 살포하고 시위를 주관하다가 십 여명
씩 청주 서부경찰서에 연행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필자는 경찰서장을 만나 농민들 다 구속시켜라.
그래서 농민 문제가 세계적으로 알려져야 농민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소리치기도 했고 시위 농민들은 풀려
나기도 했습니다.
특별히 마을에 지도자들을 목사관에 초청하여 식사를
함께 나누면서 대화를 나누는 중 시내버스를 마을까지
연장하도록 제안하여 결의하였고 세계기독교봉사회(조
치원 장로) 를 찾아가 이 일을 위하여 콩 500가마를 무
상으로 지원받아 서주우유회사에 매각하여 기금을 마련
하고 모금운동을 벌여서 토지를 매입하고 도로를 확장
하여 감격스럽게1일 19회 왕복 시내버스를 개통하는
큰 기쁨을 온 부락 주민들과 함께 가지게 되었습니다.
군청 운수과에서는 그 높은 산 고개를 넘어 시골에
무슨 시내버스 연장이냐고?
신청서를 묵살했던 것에 화가 나서 마을 지도자와 필자
가 찾아가서 국책사업으로 해야할 일을 부락 주민들의
자발적인 노력으로 신청을 했는데 현장에 나와보지도
아니하고 건방지게 된다 안 된다 하느냐고 책상을 걷어
차면서 소리치고 시 운수과장을 찾아가서 시장 이름으
로 각서 한 장을 써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우리 부락에 학생들이 야간에 등하교하며 불미스러운
사건이 발생한다면 시장이 책임을 진다는 각서를 써달
라고 억지를 부리면서 신청한 것에 운수과장이 현장에
나와 보고 나서 자기가 공직생활 40여년 동안 부락 자체
적으로 이렇게 공사를 진행한 것은 처음이라 칭찬하며
노선 허가를 약속 받았습니다.
그러나 옥산 장터에 상인들의 민원제기로 무산될 위기
를 극복하고 1일 19회 왕복으로 감격스러운 시내버스
개통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1982년)
뿐만 아니라 80년대 전두환 정권때 긴급조치 기간에도
교회에서 삼일절 기념 예배를 드리고 태극기와 프랑카
드를 들고 삼일정신 캠페인으로 행진을 마을 입구까지
가지게 되었습니다.
청주 정보기관에서 밖으로 행진할 수 없다고 압력을 받
았을 때 삼일정신도 우리 후손들에게 물려 주지 못하게
하는 나라에 무슨 희망이 있느냐? 항변했습니다.
그래서 마을 지도자들을 사택으로 초청하여 식사를
나눈 후 마을 주민들과 함께 삼일절 기념식을 가지고
반별로 삼일정신 체육대회를 가지기로 결의를 했고
추진 했습니다.
마을 주차장에서 500여명의 주민들이 모여 성대하게
삼일절 기념식과 반별 체육대회는 해마다 마을 축제로
이어졌습니다.
정보기관에서 많은 탄압이 있었지만 삼일정신을
이어가는 삼일정신 체육대회라고 항변하며 계속 추진
을 했습니다.
머리에는 농산물 수입반대 등 각종 구호로 머리띠를
띠고 옥산 장터로 해서 4km 마라톤 대회를 끝으로 체육
대회를 마치고 그날에 우승한 반에서는 공동저녁식사등
농악놀이로 마을 축제가 되었다. 삼일절에는 부락 내에
어떤 개인적인 잔치나 행사도 없었고 삼일절 기념식과
삼일 정신 체육대회에 전 주민들이 동참을 했습니다.
특별히 전두환 정권시절에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이후에 민주화 운동에 탄압을 받을 때에 충북민주화
운동협의회 의장직을 맡으면서 충북에 있는 학생운동권
이나, 기독교 운동권, 기농 카농할 것 없이 충민협안에
들어와서 민주화운동에 앞장설 때 수 없는 위기를 겪었
지만 덕촌교회와 마을이 하나 되어 필자를 보호해주기
도 했습니다.
호계리에서 나오는 교인들을 위하여 마을을 방문하여
리장과 새마을지도자와 반장들을 초청하여 다과를 나누
면서 이 마을에 교회가 필요한가? 물었을 때 자녀교육
을 위하여 필요하다고 답변을 할 때에 이마을에 필요한
예배당을 마을에 주민들의 힘으로 건축을 해보라고 권
면했을 때 주민들로 예배당 건축위원회를 구성하여 한
국교회 역사상 불신자들이(불교신자들이 많음) 예배당
건축위원으로 구성되어 그들의 손으로 예배당 건축을
완성하는 감격을 가지기도 했습니다.
이런 선교 활동으로 40여명 모이던 교회가 200여명의
출석교회로 성장하게 되었고 교파를 초월해서 농민
선교 사례 강의를 전국으로 다니게 되었고 한국 농민
선교모델로 인정을 받아 많은 농촌교회 지도자들이
현장 방문을 하기도 했습니다.
특별히 독일과 필립핀등 아시아 권에서 많은 선교사들
과 교회지도자들이 덕촌교회에서 2박 3일씩 숙박하며
농민선교 견학과 체험을 수차레 가지기도 했습니다.
특별히 예장 통합 사회부에서 주관하는 전국에 시도별
목회자와 장로가 함께 가지는 선교협의회에서 농민선교
사례 보고로 강의를 했고 기감에서는 원형수 목사와
김영주 목사 허원배 목사등이 중심이 되어 여러 지역을
다니면서 농민선교에 대한 덕촌교회사례발표와 농목에
필요성을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기장 이리 농촌개발원에서 한규채 원장을 중심으로
모이는 농촌목회자들과의 만남과 모임에서 강의도
했고 또 신학자들을 강사로 모시면 민중신학자들 밖에
없음을 안타가워 했습니다.
필자는 한국농민선교의 발전을 위하여 농민신학이 수립
되어야 한다는 고민을 가지게 되었고 이 일을 위해서는
좀더 사회과학분야의 학문과 지식을 가진 젊은 농촌목
회자들과 민중신학자들이 협력하여 농민신학을 수립해
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내 생애 가운데 농민선교만이 아니라 도시선교
를 위해서도 일해 보자는 꿈을 가지게 되었고 도시선교
를 위해서는 큰 교회로 부임하는 것보다는 작은교회로
부임하여 교회다운 교회를 만들어 보자는 꿈을 가지고
덕촌교회가 그렇게 붙잡는 손을 뿌리치고 1987년 30여
명 모이는 대전교회로 부임하게 되었습니다.
덕촌교회 정만호 장로는 이리 농촌개발원 총무로 근무
하면서도 교회를 섬길 때에 강대상에서 농민선교를
버리고 도시로 떠날 수 없다고 금식하면서 농성도 했지
만 잠시 개발원에 출근한 틈을 타서 수요일 밤 예배를
마치고 대전교회에 연락하여 다음 날 이사짐 실은 차를
가지고 오도록 해서 그렇게 정들었던 교인들에게 마지
막 작별 인사도 없이 마을 주민들과 작별 인사도 없이
노회에 사임 처리나 대전노회에 이명 허락도 없이 부임
했지만 훗날 양 노회에서 편안하게 잘 처리해 주어서
도시목회를 새롭게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45년 목회 가운데 농촌목회로 충북 봉황교회에서 담임
전도사로 3년 덕촌교회에서 11년 도시목회로 대전장로
교회에서 31년 목회를 하고 은퇴하게 되었습니다.
참 힘들고 어려웠지만 덕촌교회 목회에는 지금도 보람
을 느끼고 있어 감사하면서,부족하지만 45년 목회를
돌아보면서 우리 기장의 동역자들에게 더욱 행복한
목회로 승리하시기를 기도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