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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1) - "행동하는 신앙인으로 서라 " / 청년주일

최부옥 (서울동노회,양무리교회,목사) 2025-03-10 (월) 08:04 1개월전 80  

분문) 마 6:16~18, 사58:1-9. 고후7:2-13



오늘은 사순절(四旬節)기를 여는 첫째 주일이다. 일기는 고르지 못하지만, 겨울잠을 깨고 지하세계에서 나오는 모든 생명체들을 맞게 되는 절기, 경칩(驚蟄)까지 보내면서 봄기운 역시 더욱 짙어졌다. 아무리 짙은 어두움도 동터오는 새벽녘을 막아낼 수 없음과 흡사하다. 이제 새봄과 함께 모든 생명체들의 약동(躍動)의 계절이 개막되었다. 사실 생명체가 자기의 생존 본능을 드러 내는 것이 가장 멋진 활동이지만, 그것은 그만큼 힘을 전력으로 쏟아내야 가능한 일이다.


그러기에 이런 때, 우리 교단은 오늘을 청년주일로 맞이한다. 청년은 우리 여러 신도회들 중에서 가장 젊은 세대이다. 그러기에 봄과 함께 새 역사를 열어가는 나라의 젊은 세대를 축복하고 격려하며 이들과의 삶의 연대를 다지기 위한 마음에서 나온 적절한 선택이라고 보인다. 


그런데 사실 요즈음의 청년은 옛적의 선배 청년 세대와는 차이가 크다. 옛적은 정말 프론티어(개척자) 정신에 충만하여서, 자기들이 이 세상 모두를 앞장서서 길 닦기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승부사적 기질이 강했다. 그런 정신에서 4.19세대가 나왔고, 40대 기수론이 나왔으며, 대학가의 민주화 투쟁도 주도했고, 5.18 민주항쟁도 이끌었다. 그에 따른 수많은 젊은이의 희생과 수난이 많았다. 하지만 요즈음엔 그런 젊은 세대들의 기상도(氣像度)가 크게 허약해졌다. 


공부에 지치고, 그다음 세대가 탄탄해진 이유도 있고, 사회도 그만큼 민주화되기도 했지만, 요즈음 젊은이들의 정치와 사회에 관련된 의식 세계는 왠지 겨울잠을 자는 듯한 생명체들과 흡사하다는 느낌을 준다. 그중에서도 20대 남성들의 모습은 뜻밖에도 보수화된 집단의 대명사가 된 느낌이다. 그것도 보수 극우(極右)세력에 대거 편승 되어 있는 모습, 게다가 폭력행위에 서슴없이 빠져든 모습은 정말 큰 충격과 염려를 갖게 해 준다. 특히 요즈음 내란 사태에서 드러난 일부 젊은이들의 모습은 국가의 미래를 볼 때, 크게 염려스럽기까지 하다.


시급한 일은 건강한 신앙을 가진 젊은 정치인, 경제인, 법조인, 언론인, 군경, 지식인 등의 다양한 인물을 생산하는 일이다. 이들의 새싹들이 모든 영역에서 자라게 해야 한다. 특히 교회들도 좋은 인력들을 미래의 교회 지도자로 키워내야 한다. 이런 헌신과 노력에 지금 우리가 땀을 흘리지 아니하면, 우리 교회와 세상의 미래를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의 한국교회는 이미 맛 잃은 소금처럼 되었지 아니한가! 버림당할 직전에 놓여있다(눅14:34-35참조). 


며칠 전, 3.1절 106회 기념일에는 광화문과 여의도엔 수많은 인파로 가득했다. 놀라운 것은 전국 방방곡곡에서 차출되고 돈주고 모집되어 모인, 윤석열 탄핵반대집회에 동원된 자들이 그렇게 많이 모인 것이다. 이에 더 놀라운 것은 그들 대부분이 전국의 보수교회 교인들이라는 점이다. 게다가 주 강사도 전광훈과 손현보로 나누어지고 서로 경쟁적인 관계인 광화문파와 여의도파 두 그룹이었다. 조용했던 한국교회가 내란 주동자 감싸기에 앞장선 일이어서, 정말 어이없다! 도대체 콩인지 팥인지 분별하지 못하고 있는 이 한국교회의 실태를 어떻게 해야 하

는가-? 잇따를 하나님과 역사의 냉엄한 심판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너무도 두렵다! 


이런 중에 우리는 사순절을 맞이하여 예수님의 십자가를 향한 예루살렘 행진에 참여하게 된다. 이런 과정을 이제 6주간을 계속한다. 부디 이 기회가 우리 모두가 주님이 주신 세 본문 말씀들을 통하여, 예수의 제자의 삶을 사는 일이 어떤 것인지를 보다 제대로 깨닫고 배우며 닮아가게 되는 기회가 되길 빈다. 


오늘 첫 주일에 주신 표면적 주제는 올바른 금식(禁食)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한 말씀이다. 오늘날에는 금식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리 큰 관심사나 주제는 아니다.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금식하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젊은이들에게는 더욱 그러하다. 그럼에도 우리가 오늘 말씀으로 받게 된 주제인 금식에 대한 이해만은 반드시 소화를 시켜야 한다. 이는 우리의 앞길에 언제 금식을 해야만 할 때가 올 수도 있기 때문이고, 없어도 금식이 주는 영적 메시지만은 반드시 소화 시켜서 그 정신을 담아내는 삶을 살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성경에 따르면, 금식은 40일 기도의 주역인 모세와 예수님의 모습에서 그 원형을 찾게 된다. 이들은 기도의 한 주요 형태인 금식, 그것도 매우 오랜 단식과 절식인 금식을 통한 목숨을 건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놀라운 응답을 받아내신 분들이다. 시내산에 올랐던 모세가 40일 금식을 하면서 십계명과 숱한 여호와의 말씀인 율법을 받아낸 내용을 비롯하여(출24:18), 이 세상에 인간의 옷을 입고 메시아로 오셔서 구원자의 사역을 시작하신 예수님께서 광야에 가셔서 40일을 금식하신 일들 모두가 금식의 효시(曉示)였다(마4:2). 


그밖에 금식기도는 민족의 운명을 구원하기 위한 방편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요나 시대의 니느웨 도성은 요나의 40일 후에 멸망 선포를 듣고, 온 백성과 왕이 금식하며 회개하고 나오자 살게 된 일도 있었고(욘3:7-10), 바사 제국에서 왕후 에스더 일행은 동족의 몰살 위기를 극복하고자 3일간의 금식기도를 통하여 대역전의 기적을 맛보기도 했다(에4:16). 바벨론 포로기에 들어서는 금식일이 규칙적으로 시행되기도 했으며(슥7:3,5), 이는 예수 당시까지도 경건한 자들의 기도의 관습이 되기도 했다(눅18:12). 공식적인 금식일인 속죄일도 이어졌다(행27:9).


초대교회에서는 선교사를 파송할 때에나(해13:1-3) 교회 장로들을 세우기에 앞서 금식하곤 했다(행14:23). 사도 바울도 금식에 참여하기도 했는데, 그는 금식을 자기 훈련의 기회로 이해하였다(고후6:5, 11:27참조). 그렇다면, 이런 금식에 나는 어떤 이해를 하며 참여하고 있는가? 본문에 나타난 바를 보면서, 이제 나도 제대로 된 금식에 대한 영성(靈性)을 갖추어 보자.


1. 복음서 / 마6:16-18 / ”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


예수 당시의 금식 행위는 일종의 경건의 방편이었고 표지(標識)이기도 했다. 당시는 바리새인과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금식하고 있었다. 이는 곧 소위 경건하다고 하는 사람 정도는 최소 일주일에 두어 차례 이상을 금식하여야 할 수준이었다. 하지만 정작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런 금식을 적극 권장하진 않으셨다. 그러기에 오히려 외부 사람들로부터 ‘왜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느냐’라며 질문을 받을 정도였다(막2:18참조). 예수님은 금식 자체를 외면하시거나 부정하신지 않았고, 오히려 제대도 된 금식을 원하셨다. 본문에 나타난 내용을 살펴보자. 


1) 금식의 생명은 진정성에 있다. 곧 자기의 개인적 사정이나 입장이 금식할 수밖에 없어서 취한 것일 때 금식은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 그의 금식은 누구 보라고 하는 행위여서는 의미가 사라진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자기의 경건성을 표시하기 위하여 나온 금식에는 아주 부정적이셨다. 거기에는 외식(外飾)이나 허식(虛飾)이 끼어들기 때문이었다. 


2) 당시의 외식주의적 금식의 모습은 어땠나? 겉으로 표식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16절). 외모에서부터 슬픈 기색을 보였으며, 배고픈 자의 모습도 보였다. 그래서 자기는 진정한 경건한 자인 것처럼 사람들이 생각하도록 행세했다. 속으로 보여주려는 것 대신에 겉으로 인정받기를 더 원하고 있었다. 이런 자들에 대한 주님의 비판은 매우 엄중하였다. 그는 이미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받게 될 상(償)을 인간들로부터 받았기에, 하나님으로부터는 더 이상 받아낼 것이 없다는 것이다. 곧 금식이란 귀한 행위를 헛수고로 만들고 만 것이다. 


3) 따라서 금식은 정도(正道)를 바르게 익혀 실천하는 일이 중요하다. 방향은 금식의 기도를 받으실 하나님을 향한 것이어야 한다. 은밀(隱密)한 중에 계신 하늘 아버지에게 보이려고 해야 한다. 결코 인간의 관심을 사려고 해서는 안 된다. 진정성이 파괴되기 때문이다(17-18절). 그러기에 외모도 평소 못잖게 더 깨끗하고 단정해야 한다.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께서 갚으실 것을 믿고 매달려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인간의 금식기도는 귀하게 보신다. (이 밖에도 금식에 임하는 자들이 취할 모습들이 있는데, 그게 무엇인지 구약에서 찾게 된다) 


2. 예언서 / 사 58:1-9 / ”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꺽는 것이 아니겠느냐 “


포로기의 혹독한 국가적 시련을 경험한 유대인들은 금식기도에 눈이 뜨기 시작했다. 그래서 경건한 많은 백성들이 금식에 참여했다. 희망의 조심이었으니, 이 얼마나 고맙고 반가운 일인가? 하지만 이런 금식 행진이 계속 이어지면서, 동시에 여호와의 시원찮은 않은 반응(침묵 & 외면)에 대하여서 불만과 불평이 이어지기도 했다(1-3절). - ‘어찌하여 주께서 보지 아니하시오며 우리가 마음을 괴롭게 하되 어찌하여 주께서 알아 주지 아니하시나이까?’


이에 여호와는 당신의 종 이사야를 통하여 그들의 금식에 무슨 문제들이 얽혀 있는지를 소상히 알리시면서, 그들이 금식 기도하는 자로서 어떤 합당한 삶이 밑받침되고 뒤따라야 하는 지를 다음과 같이 자세히 일깨워 주셨다 :


1) 자신의 금식이 모두의 축복이 되게 해야만 한다. 그런데 그들은 금식하면서 자신이 일을 못 하게 되자, 그 부담을 집안의 종들과 가축들에게 떠넘겼다. 그 시간에 본인들은 오락하며 여유를 즐겼다. 그 바람에 자신의 금식하는 때는, 집안의 종들에게는 가중된 노동을 감당해야 하는 매우 가혹한 시간이 됐다. 그것도 맘에 안 들면, 주인은 종들에게 주먹질과 폭력을 행사했다. 그러니 주인의 금식은 자신들에게는 끔찍한 저주의 시간이 되고 말았다(3-5절). 


2) 금식자에 대한 하나님의 외면은 그래서 나온 결과물이다. 그런 모순된 사정을 지켜보신 하나님이 어찌 그들의 금식을 기뻐하게 받으실 수 있겠는가? 분노하실 뿐이다. 그러기에 그들의 모순된 금식을 제대로 잡아주셔야만 했다. 그래서 나온 내용이 바로 ‘여호와가 기뻐하시는 금식이 어떤 것이냐’는 가르침의 말씀이었다(6-7절). 


3)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은 종들을 혹사시키는 모습에서가 아니라, 그 시간에 쉬게 하고 여유를 누리게 하며, 자신의 쌓인 피로에서 벗어나도록 따뜻한 배려를 베푸는 자비의 시간을 허락하고 나서, 자신은 그 시간에 여호와께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라고 일깨우셨다(6절). 

- 아울러, 자신이 금식하면서 절약하게 된 여러 먹거리 여유분을 가지고서는 주변에 있는 주린 자와 유리하는 빈민과 헐벗은 자들과 특히 자신의 가난한 혈족들에게 인색함이 아닌 사랑과 도움을 주는 일임을 일깨우셨다(7절). 행동하는 신앙인으로 주님께 금식에 임하라 하셨다. 


4) 그러면, 하나님이 즉각 그의 금식과 기도에 응답해 주신다 하셨다(8-9절). 그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행동하는 신앙으로 당신 앞에 나와 엎드렸기 때문이다. 그 모습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한 자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시는 복을 베풀어 주신다(마6:33참조). 그 복은 어떤 것인가? 그 내용은 정말 찬란하다. 

- ‘ 네 빛이 새벽 같이 비칠 것이며 네 치유가 급속할 것이며 네 공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 


3. 서신서 / 고후7:2-13 / 그러나 낙심한 자를 위로하시는 하나님이 디도가 옴으로 우리를 위로하셨으니 그가 온 것뿐 아니요 --- 나를 위하여 열심 있는 것을 우리에게 보고함으로 나를 더욱 기쁘게 하였으니라 ”


본문에서는 금식에 대한 직접적인 증언은 없다. 하지만 교회의 문제에 화해의 사절로 파견되어 사도 바울과 고린도교회 사이에 발생했던 깊은 오해와 갈등의 문제를 해결하고 돌아와 그를 초조하게 기다리던 사도 바울에게 무한한 위로와 안도감을 안겨 준 젊은 동역자 디도의 활약상을 전한다. 그 일로 인하여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문제를 완전히 정리하고 마음 편안히 그의 생의 마지막 순례 여정인 예루살렘을 향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 디도는 바울의 최초 순전한 이방계 그리스도인 출신 동역자였다. 바울과의 만남의 배경과 상황은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바울은 그를 믿음을 따라 게 된 ‘참 아들’이라고 부를 정도로 그에 대한 절대적 신임을 표명하였다(딛1:4). 여러 가지 측면에서 그는 매우 유능하고 신실하며, 그 누구 못잖게 사도 바울의 마음과 뜻을 헤아려 그를 대변하고 위로하며 그의 뜻을 상대에게 전달할 수 있어서, 바울이 그에게 막중한 역할을 믿고 맡길 수 있었던 인물이었다. 


2) 그는 이미 바울과 사도 회의도 동반했다(갈2:1-5). 본문에서 나온 고린도교회 사이의 화해를 이루어내는 까다로운 사명을 떠맡아 큰 성과를 이루어내어 양쪽에 큰 기쁨을 안겨주기도 했다(고후2:13, 7:6-7,13).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모금에도 임무를 맡아 처리하기도 했다(고후8,12장). 그밖에 크고 작은 사도 바울의 위탁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면서 사도의 수족이 되고 그림자 역할을 도맡아서 바울 사역의 또 다른 한 축을 이루기도 했다(딛3:12, 딤후4:10).


3) 이런 젊은 동역자 디도의 모습은 오늘날 일부 대형교회의 목회자들이 그리스도 교회를 모욕하고 그의 거룩한 이름과 명예를 망가뜨리는 패역한 행위들과는 차원이 아주 다른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진정한 목회자는 디도와 같은 화해와 평화를 위해 일하는 젊은 크리스쳔들을 육성해 내야지, 국가와 헌법 질서와 교회의 명예를 훼손하는 폭력과 파괴에 앞장서는 젊은이들을 양산하는 자가 아니다. 그런 자들에게는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o 금주부터 우리 교회들은 주님의 십자가를 향한 사순절 순례길에 오른다. 이를 위해 참된 금식의 영성이 요구된다. 내 삶을 무엇을 위해 바칠 것인지를 진지하게 생각해야 하는 때이다. 나를 부정하면서, 주의 뜻과 영광을 드러낼 차원의 길을 진지하게 찾아내야 한다. 위선과 거짓을 단호히 거부해야 한다. 특히 흉악의 결박을 거부하고,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어낼 인물, 그러면서 화해와 평화를 위해 일할 젊은이들 육성에 전력해야 한다.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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