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역개정이나 새번역 등 우리말로 된 성경에서 “복음”이라는 단어를 검색하면 구약에서는 단 한 차례도 나오지 않고 오직 신약에서만 나옵니다. “복음(福音)”은 신약의 전유물로서, 그리스도에 의해 선포된 것이며, 그 복된 내용은 그리스도의 구원에 대한 것이고, 모든 믿는 자가 그리스도를 위해 땅끝까지 선포해야 할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리고 이것은 옳은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중요한 것인데도, 막상 신앙인들에게 “복음”이 뭐냐고 단도직입적으로 질문하면 산뜻하게 정리된 대답이 나오지 않는 경우가 많은 것도 사실입니다. 신앙생활을 오래하신 분들에게 질문을 드려도 시원한 대답을 듣기가 쉽지 않습니다. 어쩌면 신앙생활을 오래하신 분들일수록 더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일 수도 있겠습니다.
“사영리”가 정의하는 복음과 그 속성
과연 “복음”이 무엇일까요? 어떤 소식이 복된 소식일까요? 신앙인들이 전할 ‘내용’은 과연 무엇이어야 할까요? 여기에 가장 간명하게 답을 주는 것이 아마도 “사영리(四靈理)”가 아닐까 합니다. 이십 년 전쯤 ‘네 가지 영적 원리’라는 이름의 조그마한 소책자에서 보았던 것이라 그 내용이 정확히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대략은 이러합니다.
1)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닮은 창조물인 인간을 무척 사랑하시는데 (요한복음 3:16 10:10),
2) “죄”라는 것으로 인해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골이 생기게 되었으나 (로마서 3:23),
3)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그 둘 사이를 연결하는 다리가 생겼고 (로마서 5:8, 요한복음 14:6),
4)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는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 영생을 얻게 된다 (요한복음 1:12, 에베소서 2:8-9).
여기에 더 살을 많이 붙여야 하겠지만, 그래도 사영리가 정의하는 “복음”의 내용은 이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고, 아마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알고 있는 “복음”의 정의도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을 것입니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사영리”에서 인용하는 구절들이 대부분 바울서신과 요한복음이라는 점입니다. 이 점을 기억해 주세요. 나중에 할 얘기와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복음”이 가지고 있는 구원관은 크게 세 가지 특징 혹은 속성을 지닙니다.
첫째, 이 복음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절대적”인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인이므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롬 3:23), 모든 사람에게 구원이 필요하며,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는 모든 사람은 그 구원에 이를 수 있게 됩니다(“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 1:12). 문제의 원인을 모든 인간에게 적용되는 “죄”로 규정했기 때문에, 그 구원도 누구에게나 동일한 원리로 적용되는 “절대적”인 것입니다. 죄가 있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복음과 죄가 없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복음으로 나뉘어지지 않습니다.
둘째, 이 복음은 구원의 대상을 차별하지 않는 “보편적”인 것입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 3:28)”라는 바울의 말처럼. 이 구원은 인종이나 출생, 계급, 성별의 벽을 뛰어넘습니다.
셋째, 이 복음은 “개인적”입니다. 구원은 한 개인과 하나님 사이의 문제이지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와는 무관합니다. 부모가 구원을 받았다고 내가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내가 받았다고 해서 옆에 있는 가족이나 친구가 구원을 받을 보장이 생기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복음의 정의와 그 성격
그런데 여기서 질문. 이 사영리의 “복음”이 과연 예수님이 선포하신 복음과 그 내용과 속성에 있어서 동일할까요?
여기에 대답하기 위해서 성서학자들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복음서에 사용된 “복음”이란 단어를 모두 찾는 것입니다. 우선, “복음”이란 단어로 번역이 되는 그리스어 명사 “유앙겔리온(εὐαγγέλιον)”은 복음서 중에서 다음의 구절들에 나옵니다: 마 4:23, 9:35, 24:14, 26:13; 막 1:1, 1:14, 1:15, 8:35, 10:29, 13:10, 14:9, 16:15. 그리고 “복음을 전하다”라는 동사인 “유앙겔리조(εὐαγγελίζω)”가 사용된 구절은 마 11:5, 눅 1:19, 2:10, 3:18, 4:18, 4:43, 7:22, 8:1, 9:6, 16:16, 20:1입니다. 아주 흥미로운 사실은 사영리가 복음을 정의할 때 주로 사용하는 요한복음에는 단 한번도 “복음”이라는 단어가 쓰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 구절들을 다 찾아보면, 대부분은 예수님이나 제자들이 두루 복음을 전파하러 다녔다라든지, 너희는 가서 복음을 전파하라는 등의 표현들입니다. 그런데 이 구절들 중 “복음”이라는 단어와 그 복음의 ‘내용’이 함께 나오는 구절은 단 두 개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11장 5절과 누가복음 4장 18-19절이 그것입니다.
(마 11:5)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이 구절을 보면, 소경과 앉은뱅이, 문둥이와 귀머거리, 죽은 자와 가난한 자가 모두 같은 레벨로 그려진 듯 보이지만, 사실 마지막에 나오는 “가난한 자”라는 표현이 상위에 있는 표현으로서, 그 앞의 소경에서부터 죽은 자까지를 다 포함하는 말로 보아야 합니다. 이렇게 해석하는 근거는 바로 누가복음 4:18-19입니다.
(눅 4:18-19)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이 누가복음에서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큰 주제어이고 그 세부내용이 1)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2)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그리고 3) 눌린 자를 자유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서에 나오는 “가난한 자”라는 표현은 단순히 돈이 없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못 보고, 못 듣고, 못 걷고, 병에 들고, 억압당하고 포로된 모든 사람을 통칭하는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복음”의 내용, 즉, 전해야 할 소식이자 구원 사역의 구체적인 내용 역시, 보게 하고, 듣게 하고, 걷게 하고, 병이 낫게 하고, 자유케하고, 살리고 해방하는 일이 됩니다.
마 11:5와 눅 4:18-19의 문맥적 의미
이 두 구절을 좀 더 깊게 살펴봅시다. 마태복음 11장 5절은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마 11:4)”라는 세례 요한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입니다. 세례 요한이 감옥에 갇혀서, “우리가 기다리던 그 메시야가 당신 맞습니까”라고 한 질문은 곧 예수님의 정체성을 묻는 질문입니다. “당신 누구냐”라는 질문에 예수님은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고 그리스도다 라는 식으로 대답하지 않고, 이게 내가 하는 일이고, 나는 이런 걸 하러 온 사람이야 라는 식으로 대답합니다. 정체성(identity)을 묻는 질문에 사명선언(Mission Statement)으로 대답을 하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인가는 내가 하는 행동으로 결정됩니다(Who you are is defined by what you do).
누가복음 4장 18-19절은 광야에서 시험을 받은 후에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서 성경을 들고 이사야의 한 구절을 읽으시는 장면입니다. 소위 말하는 예수님의 “공생애”가 이 구절과 함께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이 역시 예수님의 사명선언(Mission Statement)이자 공인으로서의 예수님의 정체성(identity)을 드러내는 표현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명을 가지신 분이기 때문에 누가복음은 그 이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로 그 일을 계속 수행하셨음을 잘 보여줍니다. 귀신들린 자(눅 4:31-37), 온갖 병자들(눅 4:38-42), 나병환자(눅 5:12-16), 중풍병자(눅 5:17-26), 손 마른 자(눅 6:6-11)와 같은 각종 “가난한 자”들을 살리는 행위가 곧 예수님의 사명이자 예수님께서 전파하신 “복음”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 “복음”의 기원은 구약이라는 사실입니다.
구약의 복음 바사르(בשׂר)
(사 61:1-2)“주님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주님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르밧세르 לְבַשֵּׂר).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주님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복음을 선포하다’라는 의미의 유앙겔리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어근 바사르(בשׂר)의 피엘형입니다. 개역성경은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다”로 번역합니다. 히브리어를 좀 아시는 분들이라면 이 바사르라는 동사를 보면 ‘살/살코기, 육체/육신’(flesh)을 의미하는 명사 바사르(בָּשָׂר)가 떠오르실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flesh)이 되어”(요 1:14)라는 구절에 연결하여, ‘복음=육신=그리스도’라는 삼단논법을 쉽게 도출할 수 있습니다. 제게도 이런 연결은 상상력을 자제하기 어려울 정도로 무척 매혹적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마세요. 이런 것을 동음이의어(homonym)라고 합니다. 히브리어 초보자들에게서 흔히 보이는 이러한 연결은, 마치 과일 ‘배’와 신체 일부의 ‘배’와 바다에 떠다니는 ‘배’를 서로 연결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의 ‘눈’과 하늘에서 내리는 ‘눈’을 시적으로 연결할 수는 있지만, 두 단어가 하나의 뿌리에서 나왔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히브리어 운문(시)의 평행법(parallelism)을 바탕으로 본문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평행법이란 의미적으로나 문법적으로 서로 연결된 단어와 구절을 반복해서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때 ‘연결’은 동의적일 수 있고 반어적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계단식(staircase)’이라고 해서 점층적이거나 점강적일 수도 있습니다. 의미가 더욱 넓어지고 풍성해질 수 있고, 또 의미가 더욱 좁아지고 명확해질 수도 있습니다. 평행법의 핵심은 하나의 문장을 독립해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연결성 속에서 해석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본문을 평행법으로 구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주님의 영이 내게 임했다 = 주님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셨다: 동의적
* 가난한 자 = 마음이 상한 자, 포로된 자, 갇힌 자, 모든 슬픈 자: 구체화
* 아름다운 소식 = 고침, 자유, 놓임, 은혜의 해와 보복의 날: 구체화
* 은혜의 해 = 보복의 날: 동의적
이사야의 “아름다운 소식”이자 예수님의 “복음”은 다음과 같은 속성이 있습니다.
첫째, 이 복음은 “상대적”입니다. 각 사람에게는 각기 다른 형태로 구원이 나타납니다. 앞 못 보는 사람에게 귀가 들리게 하는 것은 복음이 아닐 것입니다. 손 마른 자의 발을 치료하는 것 역시 복음이라 할 수 없습니다. “죄”라는 상당히 추상적인 개념으로 모든 인간을 포괄하는 사영리의 복음과는 달리, 예수님께서 보시는 인간의 문제는 훨씬 구체적이고 개별적입니다.
둘째, 이 복음은 “차별적”입니다(남미해방신학에서는 “당파적”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합니다). 모든 인간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들에게는 “복음”이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습니다. 앞 못 보고 억눌리고 갇힌 사람에게는 복음이고, 타인을 앞 못 보게 하고 억누르고 가둬놓는 사람에게는 결코 좋은 소식일 수가 없습니다. 누군가에게 “은혜”가 되는 것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보복”이 되는 것입니다.
셋째, 이 복음은 “예언자적”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정체성과 “복음”의 성격을 철저히 “예언자 전통”에 세우고 계시는 것입니다.
두 가지 다른 성격의 “복음”
여기 하나의 복음이 있습니다. 절대적이고 보편적이고 개인적인 복음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성격의 복음이 있습니다. 상대적이고 차별적이고 예언자적인 복음입니다. 또 다른 분류로 나누자면, 하나의 복음은 ‘예수님에 대한’ 복음입니다. 다른 하나의 복음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입니다. 둘 다 ‘예수의’ 복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5장 42절을 원문으로 보면 사도들이 “그리스도 예수를 전파하기(εὐαγγελιζόμενοι τὸν χριστόν Ἰησοῦν)”를 그치지 않았다고 되어 있는데, “그리스도 예수를 전파하기”라는 의미는 이중적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가르침과 가난한 자를 위한 그의 복음을 전파했다는 식으로 이해할 수도 있고, 다르게는,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것을 전파했다고 해석될 수도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번역 성경은 두번째 의미로 해석했습니다.
저는 이 둘이 같은 것이라고 믿고 같아야 한다고 믿습니다. “가난한 자”에게 선포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아름다운 소식)”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선포하고 믿는 것과 분리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 둘이 분리된 실정을 예수원의 대천덕 신부님은 안타까워하셨습니다. 지금 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마태복음 28장과 누가복음 4장 사이의 괴리라고요.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마태복음 28:19-20)
지금 교회는 이 말씀을 예수님의 지상명령으로 받들어서, 열심히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고 세례를 베풀고는 있는데,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의 “내용”이라 할 수 있는 누가복음 4장 18-19절의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주고 눈먼 자를 다시 보게 하고 눌린 자를 자유케 하는 일에는 등한시하고 있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