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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장로교회의 신사참배에 대해 총회 차원에서 공식 회개하고 사과합시다.

김성 (서울동노회,예수원교회,목사) 2007-07-26 (목) 15:14 17년전 6677  
 

제92회 총회에 바란다.

한국장로교회의 신사참배에 대해 총회 차원에서 공식 회개하고 사과합시다.

(남해 당항교회 김성 목사)

1.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 100주년이 되는 올해 교계에서는 1907년의 성령운동을 기념하고 이를 침체된 교회의 부흥의 계기로 삼고자 하는 운동이 활발하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평양대부흥운동의 시발은 회개였다. 평양 장대현교회 부흥사경회에서 일어난 강력한 회개운동이 평양대부흥운동의 시발점이자 동력이었다. 그러므로 오늘 그 정신을 올바르게 계승하는 길은 부흥에 초점을 맞추기 보다는 부흥을 불러온 회개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라고 본다. 최근 교계가 갖가지 평양대부흥 100주년 기념행사를 벌여가고 있는데 그 초점이 회개운동 보다는 부흥운동에 맞추어져 있는 점에 대해 일각에서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최근의 기념운동들이 평양대부흥운동을 지나치게 기능적으로 접근한 나머지 자칫 열매만 탐할 뿐 그 열매를 맺게 한 씨앗을 주목하지 못하는 우를 범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이다. 1907년이 그랬듯이 2007년에도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은 부흥은 당위적 구호의 남발이나 일시적인 열광적 분위기에 휩쓸려가는 데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진실한 회개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성령100주년을 맞는 올해 2007년은 교회가 걸어온 지난 발자취 속에서, 또한 오늘 딛고 서있는 현실 속에서 하나님 앞에 진실하게 참회하고 회개해야 할 것이 없는 지를 차분하게 돌아보는 자기성찰의 시간이 되어야 하리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평양대부흥운동의 정신을 바르게 계승하는 길이요 부흥을 참되게 사모하는 자세라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나는 우리 교단만큼은 평양대부흥운동을 침체된 교회성장 분위기를 반전하려는 기회로 삼으려는 최근 교계의 분위기에 편승하기 보다는 한국교계에 참된 회개운동을 일으키는 기회로 삼는데 앞장서 주었으면 한다.


경남노회는 지난 4월 제126회 정기노회를 통해서 이번 제92회 총회에 다음과 같은 긴 제목의 헌의안을 올렸다. <장로교 제27회 총회 신사참배결의에 대한 총회 차원의 공식회개와 사과표명 헌의의 건>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우리 장로교단은 일제의 강압에 굴복하여 1938년 9월 9일 평양서문밖예배당에서 개최된 제2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공식 결의한 바 있다. 이것은 한국교회사에 세워진 치욕의 삼전도비(三田渡碑)라고 할 수 있다. 병자호란 당시 청태종의 침략과 강압에 굴복하여 조선왕이 무릎 꿇어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며 항복한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치욕의 역사가 한국교회에서 재현된 것이다. 한국교회의 삼전도비에는 이렇게 비문이 새겨져 있다.


<아등(我等)은 신사는 종교가 아니오 기독교의 교리에 위반하지 않는 본의(本意)를 이해하고 신사참배가 애국적 국가의식임을 자각하며, 또 이에 신사참배를 솔선 여행(勵行)하고 추(追)히 국민정신총동원에 참가하여 비상시국하에서 총후(銃後) 황국신민으로써 적성(赤誠)을 다하기로 기(期)함>

우(右) 성명함

소화 13(1938)년 9월 10일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장 홍택기(洪澤麒)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 제27회 회록 p9)



평양경찰서장의 주도 아래 미리 짜여진 각본대로 평양노회장 박응률(朴應律) 목사가 <신사참배의 결의 및 성명서 발표>를 긴급제안하고 평서노회장 박임현(朴臨鉉) 목사의 동의와 안주 노회원 길인섭(吉仁燮) 목사의 제청이 있자 총회장 홍택기(洪澤麒)목사가 부(否)를 묻지 않고 가(可)만 물어 신사참배결의안을 통과시킨 것이다. 결의안 통과 후 평양기독교 친목회 회원 심익현(沈益鉉) 목사가 총회원의 신사참배 즉시 실행을 특청하였고 이에 부총회장 김길창 (金吉昌)목사의 안내로 전국 23개 노회장이 총회를 대표하여 평양신사에 참배하였다. 비록 176명의 총회 총대와 30명의 선교사 사이에 97명의 일경(日警)이 끼어 앉은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강요된 침묵 속에서 내려진 결의라고 해도 주1) 일제의 강압에 한국교회가 굴복한 것뿐만 아니라 향후 적극적인 협력까지 약속한 것은 씻을 수 없는 치욕이다.


주1) 당시 일경(日警)은 총회 총대로 뽑힌 이들에게 다음 세 가지 조건 중 하나를 택하게 하고, 세 가지 모두를 불응하는 총대는 검거 투옥하였다.

첫째, 총회에 출석하면 신사참배는 죄가 아니라는 것에 동의할 것.

둘째, 신사참배 문제가 상정되면 침묵할 것.

셋째, 앞의 두 가지 조건들을 실행할 의사가 없으면 총대를 사퇴하고 출석하지 말 것.

(김양선, 한국기독교사연구, 187p) 


2.

누구에게나 과오가 있을 수 있다. 한국장로교회라고 예외일수는 없다. 신사참배가 일제의 강압에 의한 강요된 과오라 할지라도 일제의 강압에서 놓여난 다음 그 과오를 청산하고 바로잡는 일은 어디까지나 전적으로 한국장로교회의 몫이었다. 그런 점에서 한국장로교회는 해방 후 신사참배의 과오를 바로잡고 부끄러운 역사를 청산하는 데 실패했다. 1945년 6월 14일부터 평북노회 주최로 일주일간 회집된 6개노회 교역자퇴수회에서 교회재건 5가지 원칙을 채택했을 때 주2)  제27회 총회당시 총회장으로 신사참배 결의를 주도했던 홍택기 목사 등 당시 교권주의자들은 이에 강력 반발하였다. 홍택기 목사는 “옥중에서 고생한 사람이나 교회를 지키기 위해서 고생한 사람이나 그 고통은 마찬가지였다. 교회를 버리고 해외로 도피생활을 했거나 혹은 은퇴생활을 한 사람의 수고보다는 교회를 등에 지고 일제의 강제에 할 수 없이 굴한 사람의 수고가 더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그리고 신사참배에 대한 회개와 책벌은 하나님과의 직접관계에서 해결될 성질의 것이다”라고 주장하며 재건원칙에 반발하였다. 주3) 그 결과 신사참배의 과거청산문제로 장로교는 분열의 길을 걷게 되었다 주4)

이후 1947년(33회 총회), 1948년(34회 총회), 1954년(40회 총회)에서 세 차례에 걸쳐 제27회 총회의 신사참배결의를 취소하는 결의를 하였지만, 취소결의를 세 차례나 거듭했다는 것 자체가 그 취소결의가 얼마나 무의미한 것인가 하는 것을 반증할 뿐이다. 잘못된 과오는 없었던 일로 하자며 취소한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깨끗하게 과오를 인정하고 진실하게 회개하고 참회할 때 비로소 과오를 바로잡을 수 있는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한국교회는 아직까지 장로교를 포함해 어느 교단도 총회 차원에서 신사참배의 죄에 대해 하나님과 민족의 역사 앞에 공식적으로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사과하고 회개하는 언명을 표한 바가 없다. 따라서 회개운동으로부터 촉발된 평양대부흥운동 100주년을 기념하는 올 해 우리 기장교단이 앞장서서 한국교회의 신사참배 죄에 대해 총회 차원에서 공식 회개하고 민족의 역사 앞에 사과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한국교회역사에 매우 뜻 깊은 족적을 남기는 일이라 생각한다.



주2) 교회재건 기본원칙

 ㄱ) 교회의 목사, 장로들은 모두 신사참배 하였으므로 권징의 길을 취하여 통회 정화한 후 교역에 나갈 것.

 ㄴ) 권징은 자책 혹은 자숙의 방법으로 하되 목사는 최소한 2개월간 휴직하고 통회 자복할  것

 ㄷ) 목사와 장로 휴직기간 중에는 집사가 예배를 인도할 것

 ㄹ) 교회재건의 기본원칙을 전국 각 노회 또는 지교회에 전달하여 일제히 이것을 시행하게 할 것

 ㅁ) 교역자 양성을 위한 신학교를 복구 재건할 것.


주3) 이근삼, 신사참배문제를 재검토한다. 신학정론 13권 1호(1995), p28

주4) 1945년 9월 18일 부산진교회에서 열린 경남노회 재건노회에서 신사참배 관련자들의 회개와 자숙을 요구하는 다음 안이 제출되었는데 이를 거부하는 교권주의자들의 반발로 결국 고려파가 분리되어 나갔다.

 ㄱ) 목사, 전도사, 장로들은 일제히 자숙에 옮겨 일단 교회 시무를 사직할 것.

 ㄴ) 자숙기간이 종료되면 교회는 사직자에 대한 시무투표를 시행하여 그 진퇴를 결정할 것

 (하미선, 한국장로교회의 분열과 일치에 대한 연구, 합동신학대학원 2005, p12)



3. 

더구나 우리 기장교단은 태생적으로 신사참배문제 및 부일협력 시비와 관련하여 전적으로 무관하거나 자유롭지 못한 교단임을 감출 수가 없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이 우리 기장의 모태가 된 조선신학교의 개교과정 및 개교시점과 관련하여 일제의 교육정책에 협력한다는 암묵적인 동의아래 개교하였다는 따가운 눈총을 받아온 것이 사실이다. 신사참배 거부를 이유로 1938년 2월까지 미북장로교 선교회가 운영하는 8개의 중고등학교와 미남장로교 선교회가 운영하는 10개의 학교가 폐쇄당하고 평양신학교마저 신사참배결의에 반대하여 1938년 9월 20일부터 무기한 자진휴교에 들어간 상황아래서 조선신학교가 개교하였다는 점, 주5)

그리고  일본에서 유학한 송창근, 김재준, 윤인구, 일본인 미야우치 아키라 등이 조선신학교 초기교수진을 구성하였다는 점 등이 비록 조선신학교의 개교이념이 선교사의 지배를 벗어난 자주적이고 민족적인 신학교육의 기치를 높이 들었다고는 하지만 일제의 교육정책에 협력한다는 암묵적 동의하에 개교하였다는 혐의를 피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물론 이러한 혐의의 눈길을 받는다고 해서 조선신학교의 개교정신이 훼손되거나 그 당위성이 평가절하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역사적 사실에 대한 해석은 상대적일 수 있으므로 우리 교단의 태생을 그러한 혐의의 눈길로 보는 시각도 있다는 것과 그러한 시각 자체가 전혀 사실과는 무관한 오로지 우리 교단을 악의적으로 헐뜯고자 하는 불순한 동기에서 나온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장공 김재준 선생은 신사참배문제와 민족교육금지문제로 1936년 4월 평양숭인상업학교 교목을 사임하고 그 해 8월 간도의 용정은진중학교 교목으로 취임했다. 김경재 교수는 김재준 평전에서 김재준 선생이 주기철 목사처럼 일사각오의 순교정신으로 신사참배를 반대하고 저항하지는 못했지만 당장 식솔들을 먹이고 살아갈 아무 대책이 없었음에도 신사참배에 반대하는 저항의 일환으로 숭인상업학교 교목직을 사직한 것을 두고 비록 신사참배항거신앙에는 약한 사람이었지만 역사의 폭풍 속에서 살아남는 모욕을 감수하면서도 “적응하면서 저항한다”는 정신으로 살아남은 순교자 못지않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한 몸에 채운 하나님의 종이라고 높이 평가하고 있다. 주6) 그러나 김경재 교수 역시 김재준 선생이 결과적으로 신사참배에 동행한 사실을 부인하고 있지는 않다. 다만 신사참배 행위를 종교행위로서 한 것이 아니라고 변호하고 있다. 주7)

하지만 일본과 미국에서 당대 최고의 신학교육을 받은 김재준 선생이 신사참배를 종교행위로 보지 않았기에 신사참배대열에 동행했다는 것은 지식인의 구차한 자기변명으로 밖에는 들리지 않는다. 일제시대 일본과 한국에서 다년간 신사행정(神社行政)에 관여하여 신도(神道)및 신사(神社)문제에 정통한 오야마(小山文雄)는 당시 조선총독의 위촉으로 저술한 <신사(神社)와 조선(朝鮮)>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들의 조선(祖先)은 조신(祖神)에 대한 열렬한 신앙을 그대로 황실존숭(皇室尊崇)위에 옮겼다. 씨족조신(氏族祖神)의 존숭은 바로 황실존숭에 귀일되었다. 이리하여 천황(天皇)은 현인신(現人神)이 되었다. 이 국민적 감격, 국민적 신앙에 있어서 비로소 세계에 절관하는 만세일계제제(萬歲一系帝制)를 확립할 수 있었다. 이 신념이야말로 금일의 국운흉융의 기초를 열었다. 누가 선인의 위업을 추앙치 않고 누가 조신의 위덕을 찬양치 않으랴. 이것을 종교라고 칭할 수 있다면 이야말로 참으로 세계에 비류없는 위대한 종교가 되지 않으면 아니된다> 주8)

일제는 자신들의 이러한 속내와는 달리 신사참배는 단지 국민의례일 뿐 종교행위가 아니라는 허위논리를 내세워 교계의 반발을 무마시키고자 했는데 대다수의 교회지도자들이 이 논리를 신사참배 합리화의 자기논리로 삼아 신앙양심의 가책을 애써 피해가며 신사에 참배하였던 것이다. 장공 김재준 선생도 신사참배에 관한 한 이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더구나 장공 김재준 선생은 1972년 기독교사상 6월호에 실린 백낙청 박사와의 대담에서 신사참배반대자들을 가리켜 건전한 신학적 기반 위에서 신사참배를 반대했기보다는 단지 우상에 절하지 말라는 계율주의적 입장에서, 또한 일본조상을 섬기는 것에 대한 민족 감정적 반발에서 반대한 것이라며 신사참배에 저항한 당시 순교자들과 교회지도자들을 폄하하는 듯 한 발언을 하고 있다. 주9) 김재준 선생의 이 발언은 자기모순적이다. 신사참배 반대자들의 신사참배거부가 천황의 신격화나 국가종교화의 일환이라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한 신학적 무지에서 비롯된 것으로 단지 율법주의적이고 민족적 감정에서 신사 참배를 거부한 것일 뿐이라고 주장한다면 도대체 신사참배에 참여한 자신의 건전한 신학적 기반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신사참배가 천황의 인간신격화와 일본군국주의의 국가종교화라는 것을 잘 아는 건전한 신학을 가진 자신은 어째서 신사참배가 종교행위가 아니라는 옹색한 논리 뒤에 숨어 결과적으로 신사참배에 응했다는 말인가?    


일제식민지 교육정책과 신사참배에 반대하여 선교사계열 학교와 민족계열 학교가 일제히 문을 닫을 때 하필이면 일반학교도 아닌 신학교가 일제의 용인아래 설립인가를 받았다는 점, 그리고 조선신학교 설립의 주도자이자 기장의 창설자인 장공 김재준 선생의 신사참배와 관련한 이 같은 석연찮은 언행이 혹시 오늘 우리 교단이 신사참배 문제를 공론화하고 이에 대해 자성(自省)의 눈길을 보내는 것을 애써 외면하도록 하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에게 묻고 싶다.



주5) 조선신학교는 채필근 목사의 제안과 김대현 장로의 희사금을 기반으로 1939년 3월 27일 조선신학교 설립기성위원회를 조직하여 1940년 4월 19일 승동교회에서 개교하였다. 교회사가 연규홍 목사는 신학교는 교회의 지도력을 양성하는 교권세력의 중요한 기관이기 때문에 교회분열이 신학교육기관분열을 두고 일어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였다. 조선신학교 설립은 평양신학교를 중심한 선교사와 보수적인 서북교권세력들로부터 서울을 중심으로 하는 기호교권세력과 자유주의 신학세력이 신학교육의 주도권을 잡으려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연규홍, 종교권력과 교회 분열, 신학사상 131호, 2005 p236-240  

주6) 김경재, 김재준 평전(성육신 신앙과 대승기독교), 삼인 2001, p53-55

주7) 김경재, 김재준 평전(성육신 신앙과 대승기독교), 삼인 2001, p54

주8) 小山文雄, 神社와 朝鮮, p13-14, 김양선, 한국기독교사연구, 기독교문사 p174에서 재인용

주9) 김재준, 백낙청, 대담: 한국역사 속에서의 기독교, 기독교사상 1972. 6 p34-35

     김재준 曰 <이것(신사참배) 역시 건전한 신학적 기반을 가지고 고수하려 했다기 보다는 대개가 우상에 절하지 말라는 계명 때문에 우상에 절할 수 없다는 계율주의적 입장에서 신사참배를 반대한 것이라고 봐야 하겠지요. (중략) 이와 같은 율법적 의식이 신사참배를 반대하게 했지, 신학적으로, 일본천황을 신격화하는 인간신격화나 국가지상주의를 우상으로 하는 그 같은 태도를 의식하고 반항했다고 할 수는 없겠지요. 또 일본 조상을 섬긴다는 데에 감정적인 문제가 있었지 민족의 조상을 섬기는 것이었다면 그 반대의 강도가 어느 정도였겠는지 모르죠>



4.

나는 우리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가 평양대부흥운동 100주년을 기념하는 뜻 깊은 올 해 하나님과 민족의 역사 앞에 저지른 신사참배의 죄에 대해서, 그 죄로부터 우리 자신부터가 결코 자유로울 수 없으므로, 깨끗하게 죄를 인정하고 총회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하나님과 민족의 역사 앞에 회개하고 사과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면 한다. 그것이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가는 기장의 정신 아니겠는가? 오는 9월 개최되는 제92회 총회에서 1938년 제27회 총회의 신사참배결의에 대해서 총회가 공식적으로 회개하고 사과하는 성명을 채택하여 공표하는 것도 한 방법일 수 있겠다.

경남노회는 오는 9월 9일(주일)을 성령100주년 기념주일 및 신사참배회개주일로 정하고 관련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경남노회 산하 16개 교회의 연합주일예배를 준비하고 있으며 교회역사학자를 강사로 모셔 신사참배관련 역사 강좌를 개최준비중이고, 신사참배를 결의한 제27회 총회에 반대하여 총회에 불참코자 노회를 해산해버렸던 당시 경남노회장 최상림 목사(남해읍 교회)의 후손들을 초청하여 관련 증언들을 들을 계획이다. 이 외에도 신사참배관련 전시물 게시 및 기타행사들을 통해 과거의 아프고 부끄러운 역사를 되돌아보면서 역사가 주는 교훈을 얻고자 한다. 역사에서 실패의 교훈을 배우지 못하면 실패의 역사는 반복된다고 했다. 선교 120년의 자랑스러운 한국교회가 앞으로 똑같은 역사적 과오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이제 정직하게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고 사과하고 새 출발을 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자랑스러운 우리 기장교단이 그 일에 앞장 서 주기를 바란다.


연약한 우리를 언제나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은총이 사랑하는 우리 기장교단과 나아가 한국교회 위에 함께 해 주시길 기도드린다.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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