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리아, '쇼므론(שֹׁמְרוֹן)’에 대한 묵상(김창주)
앗시리아는 역사상 가장 잔인한 정복 국가로 알려졌다. 북 이스라엘 마지막 임금 호세아는 앗시리아에 조공을 바치며 명맥을 근근이 유지하고 있었다. 이집트 왕 ‘소’와 결탁하여 앗시리아를 배반하자 살만에셀은 사마리아를 공격하고3년간 압박하였다. 앗시리아 자료에 따르면 이스라엘 백성 27,290명을 포로로 잡아 갔고 거꾸로 바벨론, 구다, 아와, 하맛, 스발와임 등 여러 성읍 주민을 사마리아 인근에 이주시켰다. 그들은 이스라엘에 흩어져 살면서 각기 자기 신을 섬기며 살았다. 그러자 사마리아 사람들이 야웨 하나님을 믿지 않는 데 대하여 분개하며 그들을 공격하였다(왕하 17:25-26). 앗시리아 왕은 이 사태를 주목하고 사로잡아간 사마리아 제사장을 다시 불러와 이주민들에게 야웨 신앙을 가르치고 섬기게 하였다. 이렇듯 강제 이주로 인한 북 이스라엘 사회는 종교적 순수성을 잃기 시작했고 혈통적으로 혼혈 문제가 급증하였다. 그러던 중 예루살렘과 사마리아 사이에 결정적인 사건이 있었다. 곧 포로 귀환 이후 성전 재건 사업에 사마리아 사람들이 방해하면서 둘 사이의 반목과 불화는 점차 고조되었다(느 4:1-2). 예수 당시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의 갈등은 최고조에 이르렀다(요 4:9). 같은 민족이지만 우물을 함께 나눠 쓰지 않는 ‘이방인보다 못한 동족’이었다.
‘사마리아’의 본래 히브리어는 ‘쇼므론’이다. 북 이스라엘의 다섯 번째 왕 오므리는 세멜(שֶׁמֶר)에게 은 두 달란트로 매입하여 그곳을 사마리아(שֹׁמְרוֹן)라 이름 짓고 기원전 876년 도읍으로 삼았다(왕상 16:24). 쐐기문자 비문에 사마리아를 ‘오므리의 집’으로 표기된 것은 오므리의 영향력을 보여준다. 그후 사마리아는722년 멸망할 때까지 152년 간 북 왕국의 중심이 었다. 친숙한 ‘사마리아’는 히브리 발음 쇼므론을 칠십인의 그리스식 표기로 굳어진 것이다. 아랍식 명칭은 샤미라(Samirah), 인근 지역에서는 ‘나블루스 산’(Mount Nablus)으로 통한다. 그리하여 ‘사마리아’를 지명으로만 인식하고 동사 ‘샤마르’(שָׁמַ֨ר)에 포함된 의미에는 생각이 미치지 않는다. 지명의 공간적 위치 파악이 앞선 까닭이며 역사에서 덧입혀진 오명 때문이다. 정작 주목해야 할 점은 사마리아인들 스스로 ‘지키는 사람들’(שֹׁמְרוֹן)로 여기고 받아들인다는 사실이다. 여기에 목적어가 들어있지 않다. 그렇지만 토라, 곧 하나님 말씀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보통 사마리아에 대한 색안경을 끼고 있지만 그들의 믿음과 자부심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동사 ‘샤마르’는 ‘지키다, 따르다, 돌보다, 방어하다’ 등을 의미한다. 구약에서 ‘샤마르’는 단독으로 사람 이름이 되고, 더러는 다른 낱말과 결합하여 고유명사로 쓰이기도 한다. 예컨대 레위 지파의 찬양대 ‘세멜’(대상 6:46-47), 아셀의 후손 ‘소멜’ 등은 ‘지키는 사람’이란 뜻으로 설명된다(대상 7:32). 한편 스마랴(שְׁמַרְיָה)는 구약에 네 차례 언급된다. ‘샤마르’와 야웨의 단축형 ‘야’가 결합하여 ‘야웨가 지키신다’는 의미다. 스마랴는 베냐민 지파 장군으로 시글락에서 다윗에게 합류한 인물(대상 12:5), 르호보암의 아들(대하 11:19), 이방 여인과 결혼한 인물로 두 차례 나온다(스 10:32, 41). 스마랴는 야웨의 강력한 보호를 요청하는 이름이다.
‘사마리아’로 돌아오면 히브리어 ‘쇼므론’과 한글 음역 ‘사마리아’ 사이에 불협화음이 생긴다. 쇼므론(שֹׁמְרוֹן)은 문법적으로 분석하면 능동 분사 복수형에 가깝고 어미에 고어체 ‘눈’이 붙었다. 전문용어로 ‘연장의(paragogic) 눈’이라고 한다. 구약에 약 300여 차례 나와 의미의 변화 없이 형태를 길게 덧붙이거나 리듬을 주는 자음이다. 주로 강세를 넣거나, 운율을 맞춘다. 대표적으로 기브아(גִּבְעָה)와 기브온(גִבְעוֹן֙)이다(수 15:57; 9:3; 10:1; 삿 19:12). 일종의 활음조(euphony) 현상으로 볼 수 있다. 고대 히브리에서 ‘무엇인지 알 수 없을 때’ 표기하는 부호일 수도 있다고 보는 연구자도 있다. 문제는 번역 과정에 ‘눈’이 소실되기도 하고 새로 첨가되는 경우도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솔로몬의 히브리어 ‘슬로모’(שְׁלֹמֹֽה)로 마지막 자음 ‘눈’이 없다. 그러나 그리스어 칠십인역(Σολομὼν)과 라틴어(Salomon)처럼 ‘눈’이 붙어 현재와 같이 ‘솔로몬’으로 굳었다. ‘사마리아’에서는 거꾸로 ‘쇼므론’의 ‘눈’이 탈락한 상태로 활용되고 있다.
이쯤에서 사마리아인, 또는 사마리아 종교의 특징에 대하여 더 알아보자. 첫째, 그들은 모세 오경을 정경으로 인정한다. 즉 하나님이 모세에게 직접 계시하신 말씀을 오경으로 받아들이고 나머지는 사람의 말로 간주한다. 흔히 ‘사마리아 오경’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외부에서 일컫는 우스꽝스러운 이름이다. 마치 유대교의 경전을 ‘구약성서’라고 부르는 격이다. 밖에서 일컫는 명칭이자 잘못된 이름이다. ‘사마리아경’(The Samaritan Bible)이다. 사마리아식 히브리어로 기록되었으며 본문비평의 중요한 근거 로 활용된다.
둘째, 그들은 지금도 여전히 레위기의 제사법을 따른 ‘피의 제사’를 바친다. 사마리아인들은 기원전 11세기 엘리 시대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율법과 전통에서 멀어졌다고 주장한다. 오직 자신들만 야웨의 가르침 대로 준수하는 야웨 신앙이라고 믿는다. 그러므로 ‘쇼므론’이라는 이름에 들어있는 자칭 ‘토라를 지키는 사람들’이라는 당당한 자부심을 읽어야 한다. 스위스 용병을 라이슬로이퍼(Reisläufer)라 한다. 사전적으로는 ‘전쟁터(Reise)에 나가는 사람들(Läufer)’이란 뜻이다. 하지만 그들은 ‘눈앞의 유익보다 장래의 신뢰를 소중히 여기는 스위스 용병’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인다.
현재 사마리아 사람들은 2024년 기준 800-900명쯤으로 추산된다. 소수의 무리가 조상들이 지켜온 신념과 믿음의 전통을 고집스럽게 이어간다. 우리는 사마리아인을 야웨 신앙의 정통성을 지키지 못하고 이방 신에게 경도되어 변질된 신앙 집단, 민족의 혈통을 더럽힌 이교도보다 못한 이등 신앙인으로 평가하기 쉽다. 언제고 사마리아를 마주한다면 야웨 신앙에서 벗어난 혼합주의와 성전 재건을 반대한 세력, ‘온전한 유대인이나 온전한 이방인도 아닌’ 사람들, 등으로 심판하고 비난하기 전에 하나님의 말씀과 교훈은 여전히 ‘지키려고 애쓰는 사람들’이라는 점을 떠올려보자. ‘사마리아’ 아니 ‘쇼므론’을 통하여 토라의 음성을 새롭게 듣는 계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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