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회 제정] 제주 4·3 기념주일 예배 설교문 안내
2026년 3월 29일(주일)은 총회가 제정한 제주 4·3 기념주일입니다.
제주노회에서 올해도 정성스럽게 예배 설교 자료를 준비해 주셨습니다.
귀한 수고에 깊이 감사드리며, 필요하신 분들께서 활용하시기 바랍니다.
<백향목 집>
삼하7장 1-17절 / 계19장 11-16절 / 요19장 1-22절
국가폭력에 관한 세미나를 준비하는 어느 모임에서, 비기독교인 이었던 역사학 연구자의 ‘익숙하지만 낯선 발언’은 폐부를 찌르는 것을 넘어 존재가 부정당한 느낌마저 들었습니다,
“교회는 그 출발을 제노사이드로 시작을 해서 인지, 학살에 관대해요.”
그간 우리의 해방 기억은 이집트의 모든 처음 난 것들이 희생되는 가운데, 늘 죽음이 비껴가 살았음을 기념하는 유월(逾越)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죽음을 기억해야 하는 역설이기도 했습니다.
‘주께서 잡히시던 날’ 그 밤도 하필 유월절 이었고, 누군가를 대신 죽임으로 그들만의 세상을 꿈꾸던 자들이 있었습니다.
서슬 퍼런 독재정권 시기에, 작가 현기영이 문학적 양심으로 제주 4.3의 참혹한 기억을 소설로 불러낸 것이 어느덧 50년이 되어갑니다.(순이삼촌, 1978년)
소설의 한 구절은 국가폭력의 지독한 트라우마에 대해 이렇게 표현합니다.
“30년이라면 그럭저럭 잊고 지낼 만한 세월이건만, 순이 삼촌은 그러질 못했다.”
4.3 당시, 최대 피해마을이었던 북촌 마을에서 두 아이를 잃은 소설속의 주인공은 끝내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데 소설은 그 죽음을 이렇게 부연합니다.
“이미 30년 전의 해묵은 죽음이었다. 당신은 그때 이미 죽은 사람이었다. 다만, 30년 전 그 옴팡 밭에서 99식 총구에서 나간 총알이 30년이 우여 곡절한 유예를 보내고 오늘에야 당신의 가슴 한복판을 꿰뚫었을 뿐이다.”
시간은 더 흘러 곧 80년이 되어가지만, 여전히 멈춘 시간속의 사람들이 제주에 있습니다. 아니 제주뿐 아니라 전국 곳곳에 여전히 숨죽인 체, 살아도 죽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1948년 해방이후 정부수립 과정에서 제주에서 무려 3만에 달하는 천하보다 귀한 생명이 죽임을 당했고, 뒤이어 한국전쟁의 참화 속에 산하 곳곳에서 죽음은 일상이 되었습니다.
온 민족의 염원이었던 해방을 맞이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벌어진 일들입니다.
이스라엘은 광야시대를 지나 드디어 약속의 땅 가나안에 정착하게 되었지만, 민족적 염원이 여전히 남아 있었습니다. 바로 난공불락의 예루살렘에서 ‘여부스족’을 몰아내는 것 이었습니다.
“그러나 유다 자손이 예루살렘 성에 살던 여부스 사람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므로, 여부스 사람과 유다 자손이 오늘까지 예루살렘 성에 함께 살고 있다.(여호수아 15장 63절)
다윗시대에 이르러서야 마침내 ‘여부스 족속’을 몰아내고, 다윗 성을 건축하고 예루살렘을 수도로 삼았습니다. 사사시대를 지나 무려 400여년만의 일이었습니다.
지파 연합체의 시대를 끝내고 본격적으로 이스라엘 정부가 수립된 때입니다.
모든 것을 이룬 그때, 다윗에게 여전히 해결해야 할 중차대한 문제가 남아 있었습니다. ‘정통성’ 확보를 위해 어렵사리 모셔온 하나님의 법궤를 온전히 모실 성전을 건축하는 일 이었습니다.
다윗의 이러한 마음과 정성이 갸륵할 법도 한데, 하나님께서 나단 예언자를 통해 전하신 말씀은 “거절” 이었습니다.
거절의 이유를 본문은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고 있지만, 역대상 22장과 28장의 언급에 비추면 다윗이 피를 많이 흘렸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피를 심히 많이 흘렸고 크게 전쟁하였느니라. 네가 내 앞에서 땅에 피를 많이 흘렸은즉 내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지 못하리라”(대상 22:8)
“하나님이 내게 이르시되 너는 전쟁을 많이 한 사람이라 피를 많이 흘렸으니 내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대상 28:3)
본문 8절의 말씀처럼 양을 치던 목동이었던 다윗은, 세 번의 기름 부음 받음을 통해 이스라엘 전역을 다스리는 통치자가 되었는데 그 과정은 전쟁과 전투의 연속이었고 피 흘림이 반복되었습니다.
본문 말씀 중에 하나님께서는 다윗왕조의 영원함을 약속하실 정도로 다윗에게 강력한 신뢰를 보이시지만, 결코 성전 건축을 허락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이점은 고대시대에 필연적으로 여러 전쟁이 벌어졌지만, 그것을 <하나님을 위한> 전쟁이라 불리는 것에 반대한 것입니다.
‘모든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은 구약의 핵심 사상이기도 합니다.
다윗 스스로도, 골리앗 앞에 섰을 때, 전쟁은 창과 칼에 속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 속해있다 말하기도 했습니다.
전쟁이 하나님께 속해있다는 것은, 무엇보다 사람을 위한 전쟁에 내 이름을 망령되게 사용하지 말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언제 백향목 집을 지어 달라 했느냐?”
이점은 오늘날도 여전히 하나님의 이름을 앞세워 벌이는 여러 전쟁, 그리고 전쟁과 다름없는 온갖 차별과 혐오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를 위한다 말하지 말라.”
“내 백향목 집을 위한다는 말을 집어 치워라”
최근 서아시아 이란에서 미국과 이스라엘이 벌이는 그 끔찍한 전쟁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위한 전쟁에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을 결코 허락지 않으십니다.
해방이후 서울과 평양에 잉태된 욕심은 엄청난 죄악가운데, 수많은 사망을 낳았습니다. 각기 정통성을 앞세우며, 하나님을 앞세우며 수없이 많은 피를 흘렸습니다.
누군가는 그 피 흘림 덕분에 우리가 자유대한을 얻었고, 마음껏 예배하는 나라가 되었다고 말하지만, 하나님 여전히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언제 백향목 집을 지어 달라 했느냐?”
“네 아우 아벨의 피 소리가 들리지 않느냐?”
십자가 희생을 앞두고 유월절 마지막 식탁을 준비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전합니다. 시기로 보면 유언과도 같은 말씀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올 때까지, 포도나무 열매에서 난 것을 절대로 마시지 않을 것이다.”(누가복음 22장 18절)
살았음을 기뻐하며 기억하는 이들에게, 아니 그마저도 사라지고 빈껍데기 절기 예식만 남은 유월절에 말씀하시기를, 누군가를 대신한 죽음은 내가 마지막이 되기를 바란다는 선언입니다.
포도주로 비유된 피 흘리는 것을 멈추어야 한다는 선언은, 예수님 스스로가 마지막 희생임을 자처하며 다시는 다른 희생제물을 요구하지 말 것을 당부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시 국가권력과 종교권력이 결탁한 결과로, 십자가형에 처해졌습니다.
유대총독 빌라도는 마치 조롱하듯, 예수님 달린 십자가에 '유대인의 왕, 나사렛 사람 예수'란 명패를 달았습니다.
“이르되 너희가 이 사람이 백성을 미혹하는 자라 하여 내게 끌고 왔도다 보라 내가 너희 앞에서 심문하였으되 너희가 고발하는 일에 대하여 이 사람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고, 헤롯이 또한 그렇게 하여 그를 우리에게 도로 보내었도다 보라 그가 행한 일에는 죽일 일이 없느니라” (누가복음 23장 14-15절)
스스로가 진행했던 재판에서 찾을 수 없다는 죄목 대신, 죽어야만 하는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대한독립 만세”
제주 4.3은 물론이고, 한국 전쟁기에 죽임당한 수많은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남겼던 외마디 ‘유언’입니다.
시기적으로 이미 일제로부터 독립된 지 몇 년이 되었는데도 그들은 마치 독립운동가들 마냥,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고 죽어갔습니다.
그 까닭은, 여전히 대한민국은 ‘일장기’가 내려간 자리에 ‘성조기’가 올라갔다는 표현처럼 참다운 독립의 지위를 누리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일제 강점기의 경찰과 관리들은, 미군정의 비호를 받으며 현업에 다시 복귀했고, 설상가상으로 미군정이 열었던 여러 프로그램을 이수하며 더 높은 계급과 지위에 올랐습니다.
해방이후, 정부가 수립되기까지의 3년여 시간동안 조선 전역의 형무소에는 수형인들이 넘쳐났는데, 그 숫자는 일제강점기 35년간 투옥된 사람들의 2배를 훌쩍 넘을 정도였습니다.
해방된 새 세상에 다시 감옥에 간 사람들은, 소위 ‘깜빵 동기’라 말하는 이들을 다시 만났습니다. 소설 태백산맥은 이렇게 묘사합니다.
“해방이 되고 풀려난 독립 투쟁자 3분의2가 다시 잡혀 들어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일정치하에서 경찰질을 해먹었던 자들의 손에 다시 잡혀 들어온 그들의 죄목은 일본이 미국으로 바뀌었을 뿐인 것처럼, ‘독립투쟁자’에서 ‘공산주의자’로 바뀌었을 뿐이었다.” 「조정래 태백산맥 2권중」
4.3과 한국전쟁기 이념의 광풍 속에서 수많은 죄 없던 사람들은 '빨갱이', '폭도'라는 이름(명패)이 씌워진 채 영문도 모르고 죽어갔습니다.
때문에 오늘 우리가 주님 고난당하신 때에 십자가를 기억하는 것은, 동시에 이 죽음들을 애써 기억해내는 것입니다.
계시록의 예수님은 '피 묻은 옷'을 입고 계십니다. 이 피는 스스로 고난당하심인 동시에, 박해받은 성도들의 눈물과 고난을 기억하시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70여 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제주 도민들은 '빨갱이'라는 낙인이 두려워 입을 닫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계시록의 '신실하고 참되신 분'은 숨겨진 진실을 드러내시고 의로 심판하시는 분입니다.
인간의 역사는 진실을 묻고 그럴싸한 <백향목 집>으로 포장하려고 하지만, 역사의 주관자이신 '만왕의 왕'은 억울한 죽음을 기억하시며 마침내 모든 눈물을 닦아주십니다.
그동안 진행되어온 4·3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과정은, 성경이 약속한 '공의로운 통치'가 이 땅에 아주 작게나마 실현되는 과정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제 새 통치가 열리는 하나님의 때에는 15절의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직접 포도주 틀을 주관하실 것입니다.
‘또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고’(계15:7)
더 이상 세상의 권력자들이 흘리는 피를 금하시고, 다시금 모든 전쟁은 야훼 하나님께 속한다는 선언입니다.
4.3항쟁 당시, 수많은 이들의 목숨을 앗아갔던 토벌 방식중 하나는 ‘대살(代殺)’ 이었습니다. 도피자의 남은 가족과 친지를 죽이던 악랄한 방식입니다.
친일 군경에 의해 재현된 일제강점기의 독립군 토벌 방식이기도 합니다.
제자들과 마지막 유월절 식탁을 나누었던 예수님은 제자들을 초대하며 말합니다.
“이 빵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다.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라, 이 잔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다.”
오늘 함께 초대 받은 우리가 기억할 것은 누군가의 살을 뜯어내고, 누군가의 피를 뽑아 마셔야만 살아남는 세계에 신앙의 신비를 가지고 저항하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대신 죽이는 대살(代殺)의 때에, 스스로를 내어주신 예수님을 따라 내 이웃에게 내 살과 내피를 내어주는 자들이 될 적에 우리는 진정한 부활을 꿈꾸는 자들이 될 것입니다.
오늘 만큼은 우리 성도들이 앞서 기억해야 할 것은, 순교의 피가 아니라 수많은 학살의 ‘피 흘림’입니다. 그리고 빌라도의 ‘손 씻음’입니다.
- 이 설교문은 윤태현 목사(제주 한울/ 제주노회정의평화생명위원장)께서 준비해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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