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부옥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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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절(12) - " 조물주께서 찾으시는 믿음의 사람 " / 영생주일
2025-11-23 19:50:35
최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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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신26:4~15, 마25:31-46, 약2:14-26 

 

오늘은 창조절 열두 번째 주일이다. 절기로서는 마지막 주일이며, 대림절(待臨節) 직전 주일이다. 기후 변화는 극심하지만, 밀려오는 추운 계절 겨울은 막을 수 없다. 그런 중에도 우리의 가을이 자랑스러운 것은 외국인들에게 우리 한국의 가을 풍경, 특히 총천연색의 가을 단풍의 아름다움은 이제 전 세계적으로 최고의 작품으로 각인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중에서 특히 빨갛고 붉은색의 단풍은 우리 한국의 자연미(自然美)를 더욱 압권으로 만들고 있는 듯하다. 

 

그렇다. 우리 모두는 조물주의 특별한 선물들을 받아 누리고 산다. 조물주께서는 모든 천하 만물을 지으실 때, 어느 것 하나도 똑같이 만드신 것이 없다. 모두가 다르게 만드셨고, 그러기에 그 다른 것을 밝고 빛나게 드러낼 수만 있다면, 그는 바로 세계적 인물이 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으셨다. 그러기에 우리 자신이 주목할 것은 다른 사람의 좋은 것을 본받고자 하는 일에 못잖게, 나의 특성과 강점을 잘 살려내어서 그것으로 주변에 기여할 수 있게 하는 일이다. 

 

하나님은 결코 획일적인 인간상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모두가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그러기에 서로의 다름이 틀림이 아니라, 상호 보완해 주고 채워줄 수 있는 대상임을 인정하면서, 함께 더불어 보완하며 살아가는 인간들이 되기를 원하신다. 그런 점에서 다양성을 존중하는 민주주의가 존재하는 것이고, 획일적이고 일방적인 독재나 극우적 태도는 배제되어야 하는 것들이다. 교회와 성도들은 그런 점에서, 이런 조물주의 정신과 뜻을 성실히 받들어 좋은 세상 만들기에 앞장서야만 한다. 

 

오늘 주신 세 본문 말씀은 어떤 내용인가? 모두가 하나님의 백성들이 제대로 갖추어야 할 믿음의 길이 무엇인지를 일깨워 주신 내용들이다. 하나님을 향한 자세는 어떠해야 하고, 주변의 이웃들을 향한 자세는 무엇이 필요한 것인지를 쌍방으로 일깨워 주신 말씀들이다. 그래서 믿으면서도, 불구의 신앙이 아니라 건강한 신앙인이어야 함을 역설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오늘의 세 본문은 지금까지 줄곧 역설해 온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결정판이라 본다. 

 

구약의 신명기서의 내용은 가나안 복지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이 그 은혜를 입어 초막절을 맞이하였을 때, 어떤 모습으로 그 절기를 맞이하여야 하는지에 대한 지침을 제시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런 지침들은 그들만의 것이 아니라, 바로 21세기를 살아가는 현재의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믿음의 지표이기도 하다. 당연히 은혜를 베푸신 여호와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그러면서 받은 은혜를 주변의 연약한 이웃들에게도 베풀며 즐거움을 함께 나눈다. 그런 행동하는 신앙인의 건강한 모습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가 미래에도 계속되기를 기도드린다. 

 

복음서는 성자 예수님의 마음과 뜻을 전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것은 장차 있을 하나님의 심판은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별하듯 할 것인데, 양은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하셨다. 임금의 오른편에 앉게 될 복 받은 자는 누군가? 바로 주린 자, 목마른 자, 떠돌이, 헐벗은 자, 병든 자, 투옥당한 자와 같은 고난당하고 소외당한 이웃들에 대한 대응을 어떻게 하며 살아왔느냐에 따라 결정되었다. 놀랍게도 주님은 바로 그들과 함께 계셨던 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을 돌본 자들은, 주님을 돌본 자처럼 인정받아서 임금의 오른편에서 예비 된 나라를 상속받는다. 반면에 그들을 외면한 자들은 저주를 받아 왼편에 예비 된 영원한 불에 던져진다. 

 

서신서인 야고보서는 어떤가? 진짜 믿음과 거짓 믿음을 구별한다. 알곡 믿음과 쭉정이 믿음을 구별한다. 입술만의 믿음이나 헌신이 아닌, 행동하는 신앙과 몸으로 실천하는 실질적인 내용을 담아 전하는 신앙의 모습을 구별한다. 그런 점에서 우리 평생의 신앙이 진정 어떤 기반 위에서 건축된 것인지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말씀이다. 우리는 행함으로 믿음 있음을 입증해야 할 존재들임을 더욱 새롭게 각성시켜 준다. 이런 점에서 오늘의 세 본문은 더욱 촘촘히 엮어져서, 다시 오실 심판의 주님을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맞이할 것인지 구체화해 준다. 

 

1. 구약 / “ 셋째 해 곧 십일조를 드리는 해에 네 모든 소산의 십일조 내기를 마친 후에 그것을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에게 주어 네 성읍 안에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 그리할 때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아뢰기를 내가 성물을 내 집에서 내어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에게 주기를 주께서 내게 명령하신 대로 하였사오니 내가 주의 명령을 범하지도 아니하였고 잊지도 아니하였나이다 ”

 

이스라엘이 창조주에게 바치는 수확(收穫)에 대한 첫 열매인 맏물을 성별하여 제사장의 손길에 넘겨 드리며 감사하는 데에는, 다음의 몇 가지 깊은 의미들을 담고 있다(10-11절). 

 

1) 자기들을 방랑하는 아람족인 소수의 부족(部族)에서, 비록 애굽의 붚편하고 힘겨웠던 노예와 같은 오랜 생활을 통했던 일이었지만, 그럼에도 그곳에서 크고 강하고 번성한 민족(民族)을 이루게 하신 여호와 은총의 손길을 기억하며 감사하였다(5절).

 

2) 하나님 여호와는 자신들의 결정적인 생명줄이심을 고백했다. 그것은 애굽에서의 오랜 종살이로 탄식과 신음하며 살아온 자기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여호와께서 그의 강한 손과 편 팔과 큰 위엄과 이적과 기사로 펼치시어 자기들을 그 애굽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이곳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에 정착하여 살게 하셨음을 결코 잊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6-9절). 이 일에 있어서는 자기들은 오로지 전적으로 여호와의 은혜와 긍휼의 선물이었음을 고백하였다. 

 

3) 이곳 가나안 생활은 그동안의 조상들이 지켜온 목축업과는 달리, 땅의 소출인 농업 위주의 안정된 삶을 누리게 된 곳인데, 여호와께서는 이런 이곳 땅의 모든 소출에도 복을 주셔서 이토록 풍성한 곡식을 거두게 하셨으니, 이 또한 여호와께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에는 특히 본토 가나안인들이 오랫동안 숭배해 왔던 토속신인 바알과 아세라를 비롯한 모든 자연신들에 대한 숭배 행위도 단호히 절연하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이 모든 땅의 복까지도 다 주관하고 베푸시는 참 신(神)임을 고백하게 되는 일까지 포함되었다. 

 

4) 그러기에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자기들만의 만족과 기쁨으로 끝낼 수 없고, 주변에 여전히 빈곤과 곤궁으로 어둠에 빠져 사는 이웃들에게도 전하고 나누어서, 자기들이 받은 그 은혜와 기쁨을 그들과도 함께 하는 모두의 것으로 승화(昇華)시켜서, 결국은 온 만물의 주이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고자 함이었다(11절). 

 

그런데 셋째 해에 거행하는 감사절에는 가난한 이웃을 위한 십일조(十一條/tenth) 드림이 포함되어 있어서, 더욱 특별한 믿음과 사랑의 행위가 베풀어졌다(12-15절, 14:28-29 참조). 

 

1) 셋째 해에 하나님께 바치는 모든 소산의 십일조는, 그 대상이 제사장이나 레위인이 아니라 주변의 가난한 사람들이다(12절). 이때의 십일조를 받게 될 대상은 자신의 몫이 특별히 부여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의 일만 전업으로 삼고 살아가는 레위인들, 떠돌이 외국인들, 부모 잃은 고아들, 남편 잃은 과부들이 주 대상들이다. 그들이 그 십일조로 먹고 배부르게 살게 하는 때이다. 하지만, 그때 그들이 맛본 기쁨은 물질적인 것을 넘어, 하나님의 나라였다!

 

2) 이러한 십일조 헌물과 베풂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서 전달된 예물이요 정해진 대상들이기 때문에, 그 십일조는 역시 거룩한 성물(聖物)이다(13-14절). 그들은 주는 자나 받는 자 모두가 하나님의 돌봄과 사랑 속에 함께 살고 있다는 입장에서 모두 한마음과 하나가 된다. 이 행위를 통하여 자신들이나 자기 소유들은 모두가 하나님의 뜻을 좇는 존재요 대상임을 하나같이 고백하며 하나가 된다. 

 

3) 그들은 이렇게 주의 명령을 좇는 자기들에게 온 세상의 주되신 하나님께서 자기 민족과 젖과 꿀이 흐르는 이 땅 위에 복을 계속하여 내려 주실 것을 간구하며 미래를 위탁한다(15절). 

 

2. 복음서 / 마25:31-46 / “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영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 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

 

창조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세상에서의 삶(생)을 부여(賦與) 하실 때에는 그저 ‘한번 살아 보라’는 정도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한 생명의 생존에는 그 생존이 가능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덧붙여 주신 인간 도우미들과 환경들은 실로 막중하기 그지없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삶은 곧 책임이요 사명이 된다. 결코 무책임할 수 없다. 반드시 잘 살면서 ‘이렇게 살았다’고 생을 허락하신 이에게 마지막에는 보고할 의무가 주어져 있는 존재가 분명하다.

 

본문은 창조주 역시 우리의 삶에 대한 책임을 반드시 물으시는 분임을 확실하게 밝혀준다(31-32절). 다시 오실 인자는 우리의 심판자로 오신다는 점을 분명히 해주신다. 이때의 심판의 기준은 궁핍과 고독에 빠진 인간에 대한 자비로운 사랑의 행동을 하며 살았느냐 여부이다(40, 45절 참조). 본문에는 여섯 가지 경우가 상세히 거론되고 있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고 단지 본보기들일 뿐이다. 

☞ ‘주릴 때 먹을 것을 주었는가, 목마를 때 마시게 하였는가,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하였는가, 헐벗었을 때 옷을 입혔는가, 병들었을 때 돌보았는가, 옥에 갇혔을 때 찾아보았나’였다.

 

여기에서 가장 두드러진 메시지는 심판자 예수께서 당신이 바로 그런 고통(苦痛)을 당하는 이들과의 하나라는 메시지를 뚜렷하게 밝히셨다는 점이다(40, 45절). 그러기에 당신의 사람들이라는 자들이 그러한 어려운 처지에 있는 이들 속에 계신 주님을 보지 못하고 산다면, 그것이 바로 저주의 길에 들어선 일이 된다는 점을 명백히 밝혀주신 것이다. 예수를 믿는 우리가 보이는 예수에 뜨겁게 충성하고 열심을 내며 산다고 해도, 보이지 않게 계신 예수를 알아보지 못하고 산다면, 그것은 끝내 불행한 결과로 이어질 것이 될 것임을 엄히 경고하신 것이다. 

 

그러면 여기에서 ‘보잘것없는 자’나 ‘지극히 작은 자’는 누구일까? 예수를 함께 믿는 자들일까, 아니면 주변에 있는 비(非)그리스도인들을 말하는 것일까? 이 본문의 상황을 보면, 여기에서의 사랑과 선행의 대상은 함께 믿는 자를 향한 것이라는 생각이 농후하다. 주님은 이미 마10:42, 18:6, 10, 14에서 같이 믿는 연약한 자들에 관한 돌봄과 사랑에 관하여 깊은 주의를 환기해 주신 사례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웃 사랑에 대한 시야를 비그리스도인에게까지도 더욱 넓힐 필요가 있다. 그것은 예수님의 전체적인 말씀에 비추어 볼 때에는, 내부만의 이웃에 국한하는 일은 합당치 않기 때문이다. 주께서는 이미 마5:43-48에서 불신자들에 대한 믿는 자의 태도에 관하여 지침을 주신 바가 있었다. 곧 그리스도인들이 그들까지도(심지어 원수, 박해자까지도) 품고 사랑해 주지 못한다면, 우리가 그들보다 나을 것이 없음을 아주 날카롭게 지적하셨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는 이 본문의 가르침에서 두 가지를 가슴에 담아야만 한다. 첫째는 하나님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 사랑에도 매우 민감하게 대처하여야 한다는 점이다(22:34-40 참조). 곧 이중적 사랑의 계명 실천의 책임성에 분명하게 응답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설령 상대방과의 관계가 불편하게 얽혀 있다 하더라도, 그들에 대한 우리의 마음은 항상 열려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웃 사랑은 예수 사랑의 마음으로 실천하라는 말이다. 이때는 실천적 조처가 없는 이론적 사해동포주의(四海同胞主義)는 무가치한 것이며 보다 구체적이어야 함을 명심해야 한다(41-45절 참조). 

 

이런 주님의 요구는 우리 자신의 믿음이 지금 영벌(永罰)과 영생(永生) 사이에서 어느 곳을 향하고 있는 것이냐를 묻고 있는 매우 엄중한 경고라는 점에서, 그 일깨움이 크다! 

 

3. 서신서 / 약2:14-26 / “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 

 

믿음은 진리에 대한 단순한 이해와 깨달음으로 규정될 차원의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이해되는 바에 따른 행동이 밑받침될 때, 그 믿음의 진정성이 입증될 뿐이다. 앞의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행동으로 입증받지 못하는 믿음으로는 결코 구원이 아니라 영벌을 받을 것임을 경고하셨는데, 이번에는 그의 아우이신 야고보가 큰 확신을 가지고 그 말씀을 재(再)선포하고 나섰다. 곧 ‘행함 없는 믿음은, 마치 영혼 없는 몸처럼, 그 자체가 죽은 것이다’(17, 26절).

 

당시에는 사도 바울의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롬3:21-31,4:1-22,갈2:15-21)라는 선포에 큰 반향이 있었고 그 영향으로 믿음 절대주의로 치닫는 경향도 컸는데, 본문은 그런 이들이 자칫 놓칠 수 있는 부분, 곧 참된 믿음이란 필연적으로 사랑 안에서 효과를 내야만 하는 것임을 보완하고자 더욱 이 말씀을 모든 교회에게 강조한 것이다. 믿음은 필히 그 효과가 밑받침되어야 한다. 믿는 대로 변화를 받아, 새 삶을 살고 행동해야만 제 믿음을 사는 것이다. 

 

삶이 밑받침되지 못하는 믿음을 갖고 있다면, 그의 믿음은 헛것이요 잘못된 것이며 죽은 것이다(17, 20, 26절). 그 점을 입증하고자 야고보는 구약의 믿음의 위인들인 아브라함과 라합을 행함으로써 의롭다함을 받은 본보기로 제시하였다(23-25절). 따라서 이제 우리 모두도 행함이 밑받침된 믿음을 소유하여, 믿음의 조상들의 후손의 길에 들어가자.

 

o 사실 오늘은 창조절 마지막 주일인데, 독일교회는 이날을 영생(永生) 주일로도 지킨다. 의미 있는 주일이다. 이날에 우리는 다시 내 믿음의 내용과 수준이 영생 길에 들어설 만한 위치에 있는지에 관한 여부를 다시 묻게 되었다. 그렇다. 나의 삶은 전적으로 주어진 생이며 은혜로 살아오고 있는 생이다. 그러기에 날 보내시고 살게 하신 조물주와의 관계가 절대적이다. 그 사랑은 항상 뜨거워야 한다. 아울러, 그 사랑을 함께 사는 이웃들과도 나누며 사는 일에도 적극적이어야만 한다. 그런 인생과 삶의 모습을 하나님이 바라고 원하시기 때문이다. 힘을 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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