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혁의 십자가 1
종교라는 것은 참 신비하다.
산자는 죽겠다고 하는 것이 종교이고 죽을 사람은 살겠다고 달려드는 것이 종교다.
다 내려놓겠다고 하는 것이 종교이고 하늘에 오르겠다고 하는 것이 종교다.
새로운 출발점이 종교이고 마지막 종착점이 종교다.
고통 없이 종교는 없다.
희생 없이 종교는 없다.
고통과 희생이 없는 종교는 종교가 아니라 권력이다.
병 낫겠다고 하고 복 받겠다고 하는 종교는 미신이다.
교회가 지독히도 욕을 먹는 시대에 느끼는 바가 있다. 교회가 과연 우리 사회에서 칭찬받는 교회가 되어야만 하는 걸까? 비난 받으면 안 되는 걸까?
칭찬 받으려고 하는 종교는 가짜다. 종교뿐일까? 칭찬만 받으려는 정부도 가짜다. 칭찬만 받으려는 삶도 가짜다.
우리의 영원한 선생님 예수!
그분처럼 살면 칭찬 받을까? 어림없는 소리다.
칭찬만 받는 교회라면 결코 이 시대의 질곡을 짊어질 수 없다.
역설적이게도 교회는 하수구여야 한다. 이 시대, 이 사회의 온갖 더러움을 받아들이는 쓰레기장 교회여야 한다. 세상이 그런대로 깨끗할 수 있는 것은 하수구가 있어서다. 정화조가 있어서다. 온갖 쓰레기를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쓰레기장이 있어서이다.
하수구를 더럽다고 하지 말라. 하수구는 바로 너의 더러움을 받아들여 더러워진 것이다. 쓰레기장을 더럽다 하지 말라 바로 너의 밑 닦은 것을 받아들인 더러움이다.
교회가 더러운 것은 하수를 받아들여 더러운 것이 아니라 하수를 더럽다고 거부해서 더럽다. 똥이 더러운 것은 덜 썩어서 더러운 것처럼 교회가 더러운 것은 안 썩으려고 애써서 그렇다.
교회가 왜 가증스러울까?
마땅히 하수구가 되고 정화조가 되어야 하는데 그것을 회피해서 가증스럽다. 스스로를 높여서 고상하고자하기 때문에 가증스럽다. “예수는 창녀와 세리들의 친구였다”고 하면서 교회는 그들을 거부하고 정죄하기 때문이다. 아! 마땅히 천해야 할 교회가 너무 깨끗하고 세련되어서 가증스럽다.
고난을 달게 받겠다고, 스스로 하수구가 되겠다고, 스스로 희생하겠다고, 내가 죽고 그리스도께서 사시게 하겠다고 맘먹고 출발한 목회길인데 어느덧 권력이 되었다. 목사도 먹고 살아야 하니 밥그릇이 중요하고 또 중요하지만 투박한 나무 그릇에 만족하겠다고 나선 길인데 어느덧 밥상위에는 금 그릇이 놓여 있다.
한편 주님의 일을 하면 밥은 먹여 주시겠지 했는데 밀려오는 생활고에 몸도 마음도 영혼까지도 고달프다.
교회개혁하자고 한다.
부귀를 손에 쥐고 개혁한다는 것은 사기다.
지금의 안락을 누리면서 개혁한다는 것은 사치다.
고통과 희생의 대가로 칭찬받고자 하는 것은 위선이다.
- 목수 김홍한목사의 <십자가묵상> 중에서 -
*(2024년 10월 30일 올렸던 십자가인데. 종교개혁주일에 맞춰 다시 올립니다. 이전 게시글에는 십자가 이미지가 나타나지 않고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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