προσκυνέω(프로스쿠네오, 경배하다)에 대하여
김범식
신약성경에 60번 정도 많이 나오는 동사가 προσκυνέω(프로스쿠네오)이다. 이 동사의 명사형 προσκύνησις(프로스쿠네시스, 경배)는 신약성경에는 나오지 않고, 다만 ‘예배자’의 의미를 가진 명사 προσκυνητής(프로스쿠네테스)는 요한복음 4:23에 한 번 언급된다.
단어 προσκυνέω(프로스쿠네오)는 접두전치사 πρός(프로스, before)와 (쿠네오, kiss)가 결합된 복합동사이다. 언어적인 의미의 뜻은 누구의 면전에서 엎드려 그의 손이나 발에 입을 맞추며 존경을 표하는 행위, 혹은 경배를 하는 행위를 지칭하는 말로 시작되었다. 이것이 종교적, 의례적 의미를 가지면서, 신들이나 왕이나 권세자를 경배하는 행위의 의미로서 자연스럽게 발전되었다. 즉 단어의 세속적 용례가 종교적 행위를 나타내는 뜻으로, ‘경배하다’ ‘예배하다’의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물론 누군가의 앞에 엎드려, 혹은 땅에 엎드려 최고의 예우를 표시하는 세속적 예절의 의미는 계속 되었다.
구약성경 70인역에서는 히브리어 הִשְׁתַּחֲוָה(히쉬타하와,엎드리다)를 압도적으로προσκυνέω(프로스쿠네오)로 번역하였다. 아브라함과 롯은 나그네로 찾아온 하나님의 사자들에게 엎드렸다(창 18:2; 19:1). 구약성경의 대부분 경우에 있어서, 이 단어는 하나님 앞에 엎드리고 경배하는 장면에서 사용된 단어임을 알 수 있다. 신약성경에서는 προσκύνησις(프로스쿠네시스)의 행위(엎드림, 입맞춤)가 우상이나 다른 신들, 혹은 권세자들을 향한 의례를 넘어서서 숭배를 포함하기에, 이 단어가 예수님이나 하나님 외에 사용되는 것을 꺼려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예수님을 찾아와 엎드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면서, 마가복음의 장면들에서는 προσκυνέω(프로스쿠네오)를 사용하지 않지만, 마태복음은 예수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그를 경배했다는 것을 이 단어에서 보여준다(마 8:2; 9:18; 14:33; 15:25; 20:20). 이것은 마태복음의 저자가 의도적으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기에 인간의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다는 사실을 드러내기 위해 특별하게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탄생 이야기에서 동방 박사들이 아기 예수에게 경배하기 위해 왔을 때에도 이 단어를 사용하였다(마 2:2, 11). 사탄 자신에게 절하라는 유혹에 예수는 오직 하나님만 경배해야 한다고 성경을 인용한다(마 4:9).
누가복음-사도행전에서 사탄에게 예수는 절하기를 거절하고, 하나님만 경배하라고 말한다(눅 4: 7, 8). 사람에 대한 경배를 부정하기에, 사도행전의 베드로는 로마 백부장 고넬료가 자신의 발 앞에 엎드려 경배하는 것을 거절한다(행 10:25). 누가복음-사도행전에서, προσκυνέω(프로스쿠네오)는 오직 하나님에 대한 경배, 성전에 올라와서 드리는 예배(행 8:27; 24:11), 그리고 부활로 존귀하게 된 예수(눅 24:52)에게만 사용된 단어이다.
요한복음에서 προσκυνέω(프로스쿠네오)가 예수와 사마리아 여인과의 만남에서 여인의 영적 갈증으로 예배장소에 대한 주제를 이야기할 때 나온다. 여인이 사마리아 땅의 그리심산 성전의 예배, 유대인만이 갈 수 있는 예루살렘 성전의 예배를 말하지만(요 4:20), 예수는 worship in spirit and truth를 말하며, 예수의 존재에 의해 가능하게 된 참 예배를 선포하였다(요 4:24). 나면서 맹인 된 사람이 고침 받고 나서 다시 예수를 만났을 때, 예수에게 엎드려 경배하였다(요 9:38). 요한복음도 다른 복음서와 마찬가지로 예수가 믿는 자의 경배대상임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놀랍게도 바울 서신에는 단어 προσκυνέω(프로스쿠네오)가 고전 14:25 외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바울의 사역에는 예배가 이슈가 되지 못함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복음전파 가운데, 이방선교와 이방인 크리스천의 존재가 그의 편지의 주 관심(할례와 율법, 믿음과 의)이었기에, 예배는 중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요한계시록의 저자에게는 예배가 중요한 이슈가 되었다. 기독교 공동체에 대한 로마제국의 핍박이 시작되었고, 자신은 예배공동체에서 밧모섬에 유배되어 분리된 상태로 주일을 맞이한 시점에서(계 1:10), 하늘의 예배를 환상으로 보게 된다. 승리의 찬가와 영광송이 있는 천상예배로 박해에서도 위로와 소망을 갖게 된다. 요한계시록의 주요 주제는 로마(음녀)와 황제(짐승)에 대한 예배를 거부하고, 죽임 당한 어린 양 예수에 대한 경배가 합당하다는 메시지를 전하기에, 단어 προσκυνέω(프로스쿠네오)가 계시록 전반에 고르게 나오고 있다(계 3:9; 4:10; 5:15; 7:11; 9:20; 11:1, 16; 13:4, 8, 12, 15; 14:7, 9, 11; 15:4; 16:2; 19:4, 10, 20; 20:4; 22:8, 9). 하나님만 경배해야 한다는 절대적 메시지는 심지어 하늘의 메시지를 전하는 천사를 경배하려는 요한의 경배를 천사가 강하게 반대하는 모습에서 보인다(계 22:).
예수와 하나님에 대한 경배는 크리스천 예배의 핵심이다. 예배를 상실한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세속화시대의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진정한 예배, 예수의 영과 예수의 진리로 드리는 참된 예배를 회복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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