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내다 ‘하마드’(חָמַד)에 관한 단상(김창주)
유대교와 기독교의 십계명에 미세한 차이가 있고, 개신교와 가톨릭의 분류에도 약간 다른 점이 발견된다. 개신교와 유대교의 열 번째 계명은 ‘네 이웃을 탐내지 말라’인데 비하여 가톨릭의 열 번째는 ‘내 이웃의 아내를 탐내지 말라’가 된다(출 20:17). 후자는 17절의 상반절과 하반절을 나누어 9 계명에 ‘네 이웃의 아내를 탐내지 말라’와 10계명에 ‘네 이웃의 모든 소유를 탐내지 말라’로 지킨다. 그러나 십계명을 전체적으로 볼 때 개신교의 1-2 계명이 가톨릭의 한 계명으로 간주되니 계명의 숫자는 똑같이 열 계명이다. 열 번째 ‘탐내지 말라’는 앞의 계명들과 달리 행위가 아니라 내면의 욕망과 계획 등에 관한 교훈으로 하마드(חָמַד)의 사전적 의미를 먼저 분석해야 한다.
동사 하마드는 ‘갈망하다, 탐내다, 시기하다(출 34:24; 시 68:16; 잠 12:12; 사 1:29; 미 2:2)’로 시리아어나 아람어의 ‘칭송하다, 찬성하다’에 먼 지점에서 맞닿는다. 한편 남성 명사 헤메드(חֶמֶד)는 ‘아름다움’(사 27:2; 32:12; 암 5:11), ‘매력’(겔 23:6,12,23), 여성 명사 헤므다(חֶמְדָּה)는 보배(호 13:15), 연계형으로 사모(삼상 9:20), 낙토(시 106:24; 렘 12:10), 값진(사 2:16), 귀중한(단 11:8) 등으로 읽는다. 드물게 정관사와 함께 최상급의 의미로 활용되기도 한다. “맏아들 에서의 옷 가운데 ‘가장 (크고) 좋은 것’(הַגָּדֹל הַחֲמֻדֹת)을 꺼내어”<새번역 창 7:15>. 사람의 갈망은 단순히 ‘탐내다’로 시작하지만 점차 더 귀하고 더 값진 것을 추구하다가 누군가를 시기하며 마침내는 가장 아름답고 좋은 것으로 확장된다.
마지막 계명에 “탐내지 말라”(וְלֹא תַחְמֹד)가 두 차례 나온다. 사르나는 하마드를 물질과 사물에 대한 욕구와 탐심으로 인한 욕망에서 비롯된 개념으로 설명한다. 실제 17절에 금지된 7가지(집, 아내, 남종, 여종, 소, 나귀, 이웃의 소유)는 모두 당시의 재산, 곧 소유를 포함한다고 볼 수 있다(출 34:24; 신 7:25; 수 7:21; 미 2:2). 잠언은 아름다운 여인을 보고 마음에 품지 말라고 충고함으로써 7 계명과 10 계명을 동시에 경계한다(잠 6:25; 딤전 6:10).
한편 신명기 평행구절에서 두 번째 하마드가 ‘아와’(אַוָה)로 대체되어 살짝 다른 뉘앙스를 드러낸다. 두 동사는 보통 동의어처럼 쓰이지만 신명기에서 하마드(חָמַד)가 일반적인 의미의 탐심을, 아와(אַוָה)는 주관적, 심리적 욕망의 강조로 구별하기도 한다. 그러나 두 동사는 십계명 마무리 단계의 정신적, 심리적인 과정을 적절하게 반영할 수 있는 방식으로 동어 반복 대신 동의어를 통한 강조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한 구절에 두 차례 “탐내지 말라”고 반복한 이유는 무엇인가? 가장 손쉽고 흔한 강조법이다(출 3:4; 34:6). 십계명 말미에 두 번 연속 “탐내지 말라”는 “단단히 묶는다”는 그리스어epizeuxis (에피주식스)라 일컫는 수사법이다. 탐욕(貪慾)이란 끊임없이 경계하고 깨어 있지 않으면 언제든 비집고 나올 수밖에 없는 충동이기에 거듭 일깨워야 한다. 또한 ‘탐내지 말라’는 내면에 잠재된 상태로써 범죄로 행위화 되지 않기 때문에 아직은 책임을 묻거나 처벌할 수 없다.
중세교회는 식탐(Gula), 나태(Accidia), 육욕(Luxuria), 교만(Superbia), 분노(Ira), 질투(Invidia), 탐욕(Avaricia) 등을 ‘7대 죄악’(Septem Peccata Capitalia)으로 규정한다. 왜냐하면 일곱 가지 죄는 십계명의 원칙들을 어길 수 있게 하는 근원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카수토의 지적처럼 “탐내지 말라”는 동작과 행위보다 한 걸음 더 들어가 마음의 숱한 갈망과 무의식적인 욕구라는 근원적인 혹은 본능적인 욕망으로 이해해야 한다. 열 번째 계명은 그 자체로 교훈이 되지만 동시에 1-9 계명을 모두 아우른다. 이것은 범죄와 처벌로 이어질 수 있는 마음과 태도를 다스리게 하는 말씀이다. 예수가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다”고 질타하신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마 5:28).
하나님은 사람에게 불가능한 계명을 요구하지 않으신다. 열 번째 계명에 대한 흥미로운 해석은 ‘탐내지 말라’가 이중적인 금지명령의 족쇄가 아니라 축복에 대한 적극적인 확인과 약속으로 볼 수 있다는 점이다. 헤셸은 그의 저작 ‘안식일’에서 열 번째 계명의 의미를 “공간 속에 있는 소유를 탐내지 말고, 시간 속에 있는 것만을 탐내라”고 풀이한다. 그러니 이것은 단순히 금지명령이 아니라 축복에 대한 약속이다. 다시 말해서 첫 계명부터 아홉 번째 계명을 순종하면 이웃이 가진 것에 대하여 부러워하지 않을 축복과 보상이 있을 것이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 속한 것을 추구하며 욕망하라는 적극적인 의미가 된다. 왜냐하면 첫 계명부터 아홉 번째 계명을 지킨다면 이웃이 가진 것에 대하여 부러워하지 않을 축복과 보상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열 번째 계명에 두 번 반복된 인간 내면의 욕망과 탐심에 대한 금지는 역설적으로 하나님에 관한 긍정 계명이 되어 토라, 하나님의 말씀을 탐내라는 능동적인 교훈으로 읽는다.
십계명은 ‘네 하나님 야웨’(יְהוָה אֱלֹהֶיךָ)로 시작해(출 20:2) ‘네 이웃’(רֵעֶךָ)으로 마친다(17절). 그 중간에 서있는 우리는 위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아래로 이웃과 함께 살아야 한다. 곧 하나님과 이웃이라는 두 중요 대상을 십계명에서 확인하는 것이다. 마지막 계명은 우리에게 주어진 말씀을 순종할 때마다 지녀야 할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온전한 마음가짐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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