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인들이 많이 보는 드라마를 설교에서 활용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실행에 옮기기 쉽지 않습니다. 거실에 앉아 있다가 잠깐 보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며칠 전 그렇게 보게 된 드라마가 있습니다. TV 화면 좌측 위에 나오는 드라마 이름이 얼핏 ‘백반의 추억’으로 읽혀서 음식점 관련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요. ‘백번의 추억’이었습니다. 그래서 ‘백 가지 추억’을 말하는가 했는데 알아보니 1980년대 100번 버스 안내양 이야기였습니다. 드라마는 버스 100번과 얽힌 추억으로 시작합니다.
인상적인 드라마였습니다. 짧은 시간에 제가 평소 마음에 품고 있는 단상들이 세 개나 나왔기 때문입니다.
1. 종희[왼쪽]는 (추정컨대) 폭력적인 가정에서 탈출하여 시내버스 안내양을 합니다. 이 종희를 백화점 집 남고생인 재필이가 좋아하게 되고 마침내 둘은 분위기 좋은 경양식 집에서 ‘돈까스’를 먹게 됩니다. 수줍은 식사 자리인데요. 포크와 나이프를 사용하여 우아하게 먹는 자리에서 종희는 포크로 찍어서 그 넓은 고기를 한 입씩 먹기 시작합니다. 재필이가 어떻게 했을까요? 그도 종희처럼 먹습니다. 종희가 무안하지 않게 보조를 맞추고 있는 것이지요.
나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자유로운 몸이지만 모든 사람들에게 노예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내가 더 많은 사람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유대아 사람들에게는 내가 유대아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그것은 내가 유대아 사람들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율법 아래 있는 사람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는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나 자신은 율법 아래 있지 않지만, 율법 아래 있는 사람들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율법 없는 사람들에게는 내가 율법 없는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율법 없이 사는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율법 안에 있지만, 율법 없는 사람들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약한 사람들에게는 내가 약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내가 약한 사람들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몇 명이나마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이 모든 일을 하는 것은 복음 때문입니다. 그것은 내가 복음의 복에 같이 참여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입니다. (고전 9:19-23, 새한글)
2. 영례[오른쪽]는 대학 다니는 오빠를 위해 진학을 하지 않고 버스 안내양이 됩니다. 아주 의젓하고 배려심이 많은 ‘소녀 가장’이었지요. 그녀답게 영례는 좋아하는 재필이를 종희를 위해 포기하면서 이런 말을 했던 모양입니다. “내 행복추구권을 거두겠다. 너의 행복을 바라는 사람이 나니까!”
영례의 오빠에게는 같은 법대 친구 정현이 있었습니다. 재벌 3세입니다. 재벌집 아이답지 않게 비록 가난하지만 가족 간의 사랑이 있는 영례 집에 자주 놀러 옵니다. 어떤 것이 삶에서 중요한지 간파한 현명한 청년입니다. 영례에게 있었던 일을 알고 하는 소리인지 모르겠으나 병원 대기실에서 그는 이런 조언을 합니다.
“못난이, 대한민국 법전에 보면 첫 장에 그런 조항이 있거든. <모든 국민은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그런데 그 조항은 국가가 국민에게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약속하는 게 아니야. 행복은 주관적인 거니까. 우리가 행복을 뭐라고 생각하건 행복해지기 위한 노력을 돕겠다는 말인 거지. 그래서 행복권이 아니라 행복추구권이야. 그러니까 내 말은 행복은 결국 본인이 스스로 추구해야 되는 거라고. 하고 싶은 게 있으면 하고 갖고 싶은 게 있으면 가지려고 노력하고. 용기를 내서...”
수년 전, 제가 행복추구권이라는 개념에서 우려낸 생각은 관용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행복(행복감)은 주관적이어서 행복을 추구하는 방식은 다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사람은 그런 방식으로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방식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사실상 그 사람의 행복추구권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의 방식이 사회나 타인에게 해를 끼치거나 자기파괴적인 경우가 아니라면, 그 방식을 통한 그 사람의 행복추구는 존중되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트로트 음악을 경멸하더라도 트로트 음악을 좋아하는 삶의 방식은 존중해야 하는 것이지요.
3. 정현은 대학 졸업 후 미국으로 유학을 갑니다. 떠나기 전에 영례를 만나 (<키다리 아저씨>에서 주디가 아저씨에게 편지를 썼듯이) 자기와 계속 편지로 교류를 하자는 당부를 합니다. 갑자기 왜 ‘키다리 아저씨’인가 했는데요, 그전에 정현이가 영례를 멀리서 지켜보면서 표시 나지 않는 도움들을 주었더군요. 영례가 주동이 되어 회사를 상대로 노동쟁의를 할 때 친척 변호사의 자문을 구하고 언론사에게도 연락을 하여 회사가 양보하게 만들어 영례가 승리할 수 있게 합니다. 그때 이런 대화가 있었더군요.
<키다리 아저씨>는 우리 성도를 돌보시고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주님을 설명할 때 제가 종종 요긴하게 사용하는 이야기입니다.
[註] 내일 세계성만찬주일 설교 원고 일부입니다. 드라마 소개를 위해 이 글에는 제 소감을 적었지만 설교에서는 빠르게 <키다리 아저씨> 부분으로 간 후 요한복음 10장의 “선한 목자”를 제시하려고 합니다. 본문은 요한복음 10장 25-27절이고 제목은 “선한 목자와 그분의 순전한 양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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