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주보에 실은 설교 핵심을 설교 제목 “성도의 성장 과정: 야곱 – 이스라엘 – 여수룬”과 연결하면 어제 우리 교회에서 나눈 신앙 교훈의 얼개가 그려지실 겁니다.
2. 수십 년 전 작성된 “세 유형의 인간” 제목의 설교가 있는데요. < (1) 에서 형(型): 하나님 신앙 없이 사는 사람 (2) 야곱 型: 하나님 신앙은 있으나 자기 중심적 신앙생활 (3) 이스라엘 型: 하나님 중심의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라는 구성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세상 사람 “에서 型”을 빼고 “여수룬” 을 넣고 성도의 성장 과정으로 변환하여 신앙교훈을 구성하였습니다. 분류가 인간 유형이 아니라 신앙 수준(깊이)으로 바뀌고요. 이미 ‘야곱’과 ‘이스라엘’을 다루었기 때문에 이 설교는 ‘여수룬’에 초점이 있습니다.
3. ‘여수룬’은 하나님 백성에 대한 애칭입니다. “온전하고 의로운 자”라는 의미를 시적으로 표현해보니 “참 잘 컸네!”였습니다. 기대한 대로 잘 성장한 아이를 보고 어른들이 이런 감탄을 하지요.
4. 그 사람을 어떤 유형이라고 하면 한시적일지라도 우리는 그 사람을 그 유형으로 박제하는 것과 같습니다. 반면에 수준의 경우, 그 사람이 특정 수준에 고정되지 않습니다. 살아가면서 여러 수준을 오르고 내리지요. 야곱이 주님께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얻었어도 옛 야곱의 삶을 종종 보여주듯이 이스라엘 깊이로 성장한 성도라 할지라도 때로는 야곱의 수준으로 내려갑니다. 부단히 이스라엘 수준을 유지하려고 노력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이스라엘 수준과 여수룬 수준은 어떤 차이일까요?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려는 마음(신앙심)이 자동적으로 하나님 중심의 삶(신앙생활)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신념(‘믿음’)과 행위의 통일은 이상적인 경우에만 해당됩니다. 우리의 신념은 보통 “의지”과 “수고”를 통해 행위로 이어집니다. 이스라엘 수준이 신념이라면, 여수룬 수준은 그 신념이 삶으로 이어진 상태로 여기고 설교를 구성하였습니다.
5. 세 이름 중에서 난해한 이름이 ‘이스라엘’입니다.
신학자들은 대체적으로 <하나님>과 <싸우다(겨루다)>는 의미가 들어있다는 것에 동의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싸우다”일까요? “하나님과 싸우다”일까요?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창세기 32장 28절에 있는 밑줄이, “하나님이 싸우다(하나님의 통치하심)”는 의미라고 생각하는 가설의 부정적 증거가 되는데요. 이것을 해소하는 방법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1) 밑줄이 ‘이스라엘’ 표현의 의미라고 할지라도 둘 사이에는 “언어유희”(wordplay) 관계가 있습니다. 밑줄을 그대로 이스라엘의 의미로 볼 수 없는 것이지요.
(2) 사실은 밑줄이 이스라엘의 의미가 아니라 야곱의 의미입니다. ‘야곱, 네가 그동안 밑줄처럼 살았는데 이제는 다른 삶을 살아가라’는 당부로 보는 것입니다. 밑줄의 의미소를 가지고 있으면서 밑줄과 반대되는 의미를 ‘이스라엘’에 부여해야 하는 것입니다.
(3) 밑줄 원문에 있는 히브리어 ‘임’이라는 전치사를 “하나님과”가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로 보면 “하나님이 야곱의 편이 되어서 함께 싸우셨다”가 되는데 여기에는 이스라엘 이름에 있는 “하나님의 통치”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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