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를 나타내는 히브리어 “헨(חן)”에 대한 묵상(2)
송민원
첫번째 묵상에서 히브리어 “헨(חֵן)”의 “불쌍히 여김, 긍휼히 여김,” 그리고 “값없이, 공짜로”의 의미를 강조해서 살펴보았다면, 이번에는 그 두번째 의미인 “까닭 없이, 이유 없이”에 대해 묵상하고자 합니다.
“헨(חֵן)”이 성경에서 처음 쓰인 곳은 창세기 6장 8절입니다: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개역개정).” 직역하면, “노아는 주님(YHWH)의 눈 속에서 은혜(헨)를 발견했다”가 됩니다. 우리가 여기서 던져야 할 질문은 “왜?” “무엇 때문에?”입니다.
창6:8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창6:9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인과응보 사상에 익숙한 시각으로는 8절과 9절을 인과관계로 읽게 됩니다. 노아가 의인이요 완전한 자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선택을 받고 그분의 은혜를 입었을 것으로 손쉽게 연결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두 문장을 그렇게 연결시키지 않습니다. 굳이 JEDP 문서가설을 언급하지 않더라도(가설은 가설일 뿐입니다), 우리의 성경은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라는 문장을 중간에 위치시킴으로써 노아가 주님(YHWH)께 은혜를 입었다는 사실과 의인이고 완전한 자라는 노아의 캐릭터를 분리시킵니다. 즉, 노아가 의인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것이라고 성경은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다. 여기서 “헨”의 이유 없음, 까닭 없음이라는 의미가 발동합니다. 하나님으로 하여금 노아를 선택하시게 만든 원인이 노아의 의로움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에는 이유가 없습니다.
“헨”의 이 두번째 의미를 가장 치열하게 다룬 성경이 바로 욥기입니다.
욥1:1 우스 땅에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욥1:2-3 그에게 아들 일곱과 딸 셋이 태어나니라 그의 소유물은 양이 칠천 마리요 낙타가 삼천 마리요 소가 오백 겨리요
암나귀가 오백 마리이며 종도 많이 있었으니 이 사람은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훌륭한 자라
욥기 1장 1절은 욥이 잠언이 말하는 규범적 지혜를 온전히 따른 사람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2-3절은 욥이 받은 물질의 축복과 자녀의 축복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문장관계 역시 잠언의 규범적 지혜(인과응보/권선징악)에 익숙한 독자들은 1절과 2절 이하 사이를 원인과 결과로 손쉽게 연결 지을 것입니다. 욥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잘 따른 의인이기 "때문에" 잠언이 약속한 보상을 받은 것이라고요.
만약 욥기의 첫 구절들을 이렇게 잠언의 시각으로 읽었다면, 그것은 욥기가 파놓은 함정에 빠진 것입니다. “욥이 어찌 까닭없이(헨 חֵן)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1:9)”라는 사탄의 질문을 통해 욥기가 독자들에게 던지는 신학적 물음은 바로 이 1절과 2절 이하의 관계가 인과관계인가를 묻는 것입니다. 즉, 욥이 규범적 지혜를 따라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을 멀리했기 “때문에(원인)” 2절 이하의 복을 받았는가? 혹은, 욥은 2절 이하의 축복을 “받기 위해(목적)”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을 멀리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2절 이하의 복을 예상/기대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받은 복을 제거하면 욥이 더 이상 하나님을 경외하는 의인으로 남아 있을 이유는 없다는 것이 사탄의 주장입니다. 한 마디로, “신앙은 투자”라는 주장입니다. 대가를 바라지 않는 신앙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인과응보사상의 약한 고리를 정확히 파고드는 사탄의 질문에 욥은 신앙인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답변을 내어놓습니다: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1:9)”,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2:10).” 욥의 대답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실 때와 거두실 때, 복을 주실 때와 화를 주실 때 어떤 특정한 원칙에 따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과 화가 “까닭 없는(헨 חֵן)” 것이라는,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자유에 대한 신앙고백입니다. 2절 이하의 복이 없어진 상태에서도 여전히 욥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로 남아 있음으로 해서 사탄의 주장을 무너뜨리고, 하나님에 의해 “온전한 자(=지혜자, 의인)”라는 판결을 받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욥기 1장 1절과 2절 이하를 다시 살펴보면, 욥기는 두 문장을 연결할 때 아무런 접속사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단지, 두 가지 사실을 단순히 나열하고 있을 뿐입니다. 즉, 그 둘이 인과관계가 아니라는 진술을 욥기는 처음부터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둘을 인과관계로 읽으려는 독자들의 “관성,” 혹은 “게으름”을 여실히 폭로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무런 이유 없이, 까닭 없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것을 우리는 “은혜”라 부릅니다. 욥기가 우리에게 던지는 가장 중요한 질문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러하신 것처럼, 당신도 아무런 이유 없이,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는가? 당신도 역시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가? 신앙은 투자라고 말하는 사탄의 주장에 굴복하지 않을 수 있는가?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하박국3:17) 당신은 여전히 하나님 한분으로 인해 즐거워하고 기뻐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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