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수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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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폐된 동행[시편 23편 1-6]/ 메시지해설 포함
2025-09-15 17:36:59
김민수
조회수   93

은폐된 동행
본문: 시편 23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창조절을 맞아 우리는 목가적인 풍경이 담겨 있는 시편 23편의 고백을 붙잡습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참으로 익숙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고백은 삶의 가장 어두운 자리, 하나님이 부재하시는 듯한 자리에서 나온 신앙의 절규이자 확신입니다. 그래서 묵상하면 묵상할수록 우리에게 깊은 위로를 줍니다. 그리고 이 말씀 때문에라도 우리는 하나님을 떠날 수 없습니다. 우리와 늘 동행하시는 하나님을 어떻게 떠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문제는, 삶의 현실에서는 동행하시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것 같고, 우리의 기도를 듣지 않으시는 것 같은 경험을 우리는 종종 합니다.

 

사진의 필사적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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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저는 오랜만에 동대문 DDP를 산책하며 흑백사진을 찍었습니다.
어두운 지하계단을 올라가는 한 사람의 뒷모습이 담겼습니다. 얼굴은 보이지 않습니다. 계단 위로는 먹구름 낀 하늘이 드리워져 있고, 그 뒤로 거대한 건물이 묵묵히 서 있습니다. 제주 오름을 닮은 듯한 곡선을 가진 지붕이지만, 자연미보다는 차갑고 인위적인 스테인리스의 느낌이 강합니다. 사진 속 인물은 계단을 오릅니다. 그는 마치 삶의 무게를 짊어진 채 빛을 향해 나아가는 순례자처럼 보였습니다. 저는 이 사진에 이렇게 글을 붙였습니다.

 어두운 지하에서 한 사람이 계단을 오른다.
빛과 그림자가 교차하는 입구 너머, 거대한 건물이 하늘을 가르고 서 있다.
그의 걸음은 무겁고 느리다. 그러나 멈추지 않고 도시를 향해 나아간다.

2022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프랑스 작가 아니 에르노는 사진의 용도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진의 필사적인 의미. 우리는 구멍을 통해 시간의 무, 무의 불변의 빛을 엿본다.”

사진은 이미 사라진 순간을 보여줍니다. 존재하지 않는 장면이지만, 분명히 있었던 장면을 우리 앞에 남겨줍니다. 그래서 사진은 부재를 보여주지만, 동시에 사라진 것을 다시 기억하게 함으로써 현존하게 만드는 힘을 가집니다.


민중의 아버지

우리의 신앙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고, 침묵하시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기도해도 대답이 없고, 고통은 계속되며, 정의는 무너지고, 사랑은 멀어집니다. 그때 우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잊으신 것 같다.”

 1980년대 도시빈민 선교에 헌신하다가 1997년 서른여섯의 젊은 나이에 위암으로 세상을 떠난, ‘빈자의 친구김흥겸 전도사는 이런 노래를 만들었습니다.

우리들에게 응답하소서 혀 짤린 하나님
우리 기도 들으소서 귀먹은 하나님
얼굴을 돌리시는 화상당한 하나님
그래도 당신은 하나뿐인 민중의 아버지
하나님 당신은 죽어버렸나
어두운 골목에서 울고 계실까
쓰레기더미에 묻혀버렸나 가엾은 하나님

언뜻 보면 불경스러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 도시빈민의 상황을 떠올리면, 이 노래는 그들의 절박한 심정을 담은 기도였습니다. 무엇보다 그래도 당신은 하나뿐인 민중의 아버지라는 고백 속에는, 끝내 응답하시고 들어주시며, 고난당하는 이들을 바라보시고 울어주실 분은 하나님 한 분뿐이라는 신앙의 고백이 담겨 있습니다.

 

은폐된 동행

그러나 성도 여러분, 그 부재는 부재가 아닙니다. 그것은 은폐된 동행입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그러나 확실히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성경에도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것처럼 보이는 장면이 자주 등장합니다. 대표적인 예가 엘리야입니다.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자들과 맞서 승리했던 엘리야는 곧바로 무너집니다. 이세벨의 협박 앞에 광야로 도망쳐 로뎀나무 아래 주저앉아 이렇게 기도합니다. “여호와여, 이제는 차라리 제 생명을 거두어 주십시오. 더 이상 살 힘이 없습니다.” (왕상 19:4) 그는 하나님이 자신을 버리신 것처럼 느꼈습니다. 철저한 침묵과 부재의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떻게 응답하셨습니까? 큰 바람에도, 지진에도, 불에도 계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세미한 음성으로 다가오셨습니다. 엘리야는 그제야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곁에 계셨다는 것을. 침묵 속에서도 은폐된 동행으로 함께하셨다는 것을.

 

신앙에서 멀어지는 이유

교회를 떠나거나 신앙에서 멀어지는 이들의 이유를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교만 때문에 하나님을 떠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총 속에 살면서도 자기 힘으로 살아간다고 믿는 이들입니다. 은혜는 여전히 흐르고 있는데, 자기 성취와 자기 능력의 환상에 가려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침묵하시는 것처럼, 부재하시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사실은 하나님이 침묵하신 것이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 눈과 귀를 닫아버린 것입니다.

둘째, 절망 때문에 하나님을 떠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간절히 붙잡고 기도하지만, 끝내 응답을 듣지 못했다고 느끼는 이들입니다. 그들은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부재를 절망적으로 체험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이 은폐된 동행의 자리일 수 있습니다. 침묵은 외면이 아니라, 더 깊은 방식의 임재일 수 있습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

시편 기자는 절망의 자리에서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가?” (42:5)

그러나 이어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오히려 하나님을 바라리로다.”

하나님이 부재하신 것 같아도, 그것이 은폐된 동행임을 알기에 붙잡은 고백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인생의 계단을 오르다 보면 숨이 가빠지고, 빛은 멀게만 느껴지며, 하나님은 침묵하시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떠나신 적이 없습니다. 사진이 사라진 순간을 증언하듯, 하나님의 침묵은 그분이 여전히 곁에 계심을 증언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찬양하고 고백합니다.

오늘 시편 23편은 우리에게 약속합니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침묵 같았던 시간도, 부재처럼 보였던 순간도 결국 하나님의 은총이 우리를 이끄는 길이었음을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그분이 보이지 않아도, 대답이 들리지 않아도, 은폐된 동행을 믿으십시오. 하나님은 여전히 여러분 곁에 계십니다. ‘나의 가는 길이라는 찬양을 함께 부르며 늘 함께하시는 주님을 묵상합시다.


거둠기도

주님, 때로 우리는 어두운 골짜기에서 하나님의 부재와 침묵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은폐된 동행으로 우리와 함께 계심을 믿습니다. 교만 속에서 은총을 가리우지 않게 하시고, 절망 속에서도 주님의 세미한 음성을 기다리게 하소서.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붙잡고, 영원히 주의 집에 거하는 믿음을 허락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은폐된 동행 메시지 해설 / 아래 링크를 누르시면 유튜브로 연결됩니다.
 
https://youtu.be/uWT9v8_8Yp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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