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주제에 대한 일련의 글에서 제가 “이렇게 해도 되고 저렇게 해도 된다”는 표현을 종종 썼습니다. 규칙대로 해도 되고 안 해도 된다는 말과 비슷했는지, 이 점에 대해 질문을 주신 분이 있는데 이제야 차분하게 답변드려 봅니다.
회의 규칙을 엄격하게 적용해야 하는가, 융통성 있게 적용해야 하는가에 대한 상위 규칙이 있을까요? “규칙에 대한 규칙”(메타meta 규칙)인 셈인데요. 오래전 영문 자료를 검색하다가 힐끗 보아서 출처를 댈 수 없지만 흥미롭게도 <로버트 회의 규칙>에 그런 규칙이 있습니다. 수십 년 전 제가 회의록부서기였을 때 작성법을 가르쳐준 사수(射手-회의록서기) 버전으로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 “죽고 사는 문제 아니면 그냥 넘어갑시다!”. 로버트 회의 규칙에 가깝게 표현하면 이렇고요. “심각한 규칙 위반이 아니라면 회의의 원활한 진행을 위해 융통성을 가지라.”
이 메타 규칙을 반영한 규칙이 “제43조 투표수와 회원수”이지 않나 싶습니다. “투표 전에 회원수를 점검한 후 투표하고 개표위원은 투표용지를 세어서 회원수보다 모자라면 무방하나, 많으면 회장에게 보고하고 회장은 확인하고 무효(투표 무효)로 선언한다.”
예를 들어 투표용지가 10장 나갔는데 투표함에는 12장이 있으니까 ‘부정 선거’로 의심되고 이 일은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사태입니다. “투표 무효!”가 원칙입니다. 그럼에도 회의규칙은 원활한 회의 진행을 위해 넘어갈 수 있는 길을 터줍니다 - “단, 확인된 표수가 결정에 영향이 없으면 다수표에서 제하기만 한다.” 일단 이렇게 회의 진행은 하고요. 필요하다면 폐회 후 투표용지 2장이 더 들어있게 된 원인을 규명하라는 것이지요. 지난 선거의 투표 사무에 심각한 문제가 있었지만 무조건 “재투표”(투표 무효의 후속 조치)를 하지 않는 법적 근거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렇게 해도 되고 저렇게 해도 된다”는 제 말이 “아무렇게나 해도 좋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원칙은 있으나 사안의 성격을 다르게 보거나, 원활한 회의 진행을 위해 다른 방식을 허용할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질문하신 분이 염두에 둔 것은 <601. [일반 회의규칙] 정치부 보고를 받기로 동의합니다!>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축조심사할 때 (정치부 조언을 염두에 두면서) “정치부로 이첩된 그 안건”들을 회원들이 “허락이요”로 넘긴 후 수정할 안건이 없으면 “그 안건들 전체”를 일괄표결하면 됩니다(일반 회의규칙 제13조 3항 제3독회). 가결 선포되면 보고한 정치부원은 인사하고 회원석으로 돌아가면 되고, 회의록에는 “(정치부로 배정된) 안건을 결의한 후 (정치부가 대신 나선) 보고를 받다” 적고, 그 아래에 결의 사항을 나열하면 될 듯합니다.
어쨌거나 정치부 보고하는 형식으로 안건들을 다루었으니, 사족에 불과하더라도 일괄표결 결과 선포 후 자동으로 정치부 보고를 마치지 않고 “정치부 보고를 받기로(마치기로) 동의합니다!-재청-예”를 거쳐 보고를 마무리해도 되겠습니다
(1) 원칙은 “일괄 표결의 결과를 의장이 선포하면, 보고자는 회원들에게 가볍게 인사한 후 회원석으로 들어가고, 의장은 ‘다음 안건 다루겠습니다’”는 것입니다. 정치부로 이첩된 후 정치부가 그 안건에 대한 ‘조언’을 한 후에 표결한 안건(정치부 소관 안건)들이 다 처리되었으니까요. 그러나 안건들이 정치부 보고라는 큰 틀에서 처리되었기 때문에 표결이 마친 후에 보고자가 즉시 회원석으로 가지 않고 회원들의 “정치부 보고를 받기로(마치기로) 동의합니다!”와 “재청”과 “예(可)”를 거쳐 보고를 마무리해도 된다는 것입니다. 앞의 방식은 사무적이거나 기계적이지만 뒤의 방식은 회원의 의사를 촘촘하게 묻기 때문에 회의 분위기를 좋게 합니다. 융통성 있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2) 축조심사할 때 회원들이 “허락이요”하는 것을, 옛날 교회법 전문가는 “쟁점이 없으니 일단 넘어가고 맨 뒤에서 한꺼번에 일괄표결하자”는 의미라고 합니다. 정치부로 이첩된 여러 안건들을 축조심의할 때 사용하는 ‘허락’이, 옛날에는 “일괄표결”을 전제했을지 몰라도 지금은 우리 교단 “일반 회의규칙” 제5장 제37조에 있는 “이의가 없는 안건을 허락으로 처리할 수 있다”의 ‘허락’에 가깝습니다. 사실상 그 안건을 “가결”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 안건씩 처리해가다가 쟁점이 되는 안건이 나오면 허락이 아닌 “본격적인 표결”로 처리하지요. 이런 경우 일괄표결이 없기 때문에 마지막 안건을 허락하거나 정식 표결하고 나면 보고를 종결하게 하는 발언이 필요하고 이 경우 가장 자연스러운 것은 회원 중의 한 분이 “정치부 보고를 받기로 동의합니다!”하여 마무리 수순을 밟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보니 13조 “안건심의”의 1항 “제1독회”, 2항 “제2독회”, 3항 “제3독회”에 부합되는 안건은 정치부로 이첩된 안건들을 심의한 후 보고할 때 축조심사하는 경우가 아니고, 내용이 상당히 많은 <단일 안건>인 경우입니다. [제1독회] 안건 내용 대략 파악하기 [제2독회] 안건의 글자나 문구를 하나하나 살피며 필요하면 표결로 수정하기 [제3독회] 수정된 안건 전체를 두고 표결하기
한국 교회에서 전통적으로 이 조항을 <서로 독립된 안건들을 한꺼번에 처리하는 “정치부 소관 보고”>에도 적용하다 보니 이 보고에서도 “일괄표결”을 해야 하고 그래서 이때의 ‘허락’은 “일단 넘긴다”는 의미로 여긴 것 같습니다. 허락을 약식 가결로 본다면 <정치부 소관 안건 보고>에서 일괄표결할 필요가 없습니다. 축조심의하면서 이미 각 안건을 표결한 셈이니까요.
(3) 융통성을 가져야 할 대표적인 사안이 “보고사항” 마무리입니다. 안건을 “결의 사항”과 “보고 사항”으로 구별하고 “보고 사항”의 경우 부서나 위원회 임원이 보고한 후 질문과 답변을 하고 더 이상 없으면 의장이 “이것으로 보고를 마치겠습니다”하여 마무리한다는 것을 모두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의장이 “어떻게 할까요?” 하면 회원 중의 하나가 “보고 받기로 동의(動議)합니다”하여 마무리 수순을 밟을 수도 있습니다. 이 회원의 동의는 엄밀히 말하면 “보고 내용”에 대한 것이 아니라 “보고 절차 종결”에 대한 것입니다. 대표적인 보고 사항이 재판국의 판결 보고입니다. 판결을 본 회의에서 번복할 수 없습니다. 흔히 하는 말로 “보고는 보고로 끝내야” 합니다. 하지만 이 경우도 회원 중의 하나가 “재판국 보고를 받기로 동의합니다”라고 발언할 수 있습니다. “판결문에 대한 동의”가 아니라 “재판국 보고 절차를 종결하자는 동의”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보고는 보고로 끝낼 수 없고 의결을 요하기도 합니다. 수습위원회의 보고가 그 경우입니다. 보고 끝에 “수습안”을 본 회의에 제출하게 되는데 보고자가 보고를 마친 후 회원 중의 하나가 “수습위원회 보고를 받기로 동의합니다!” 하는 것은 “수습위원회 보고 절차를 종결하자는 동의”가 아니라 “수습위원회의 수습안을 승인하자는 동의”입니다. 재판국의 경우와는 다르네요.
사안에 따라 “보고를 받기로 동의합니다!”의 의미가 미묘하게 다르지만 똑같은 표현으로 의결사항은 의결 절차에 들어가고, 보고사항은 보고 절차를 종결시키는 발언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널널한 표현인 것이지요.
표결에도 융통성이 있습니다. 이의가 예상되지 않는 안건의 경우 의장은 “이의가 없습니까?” 묻고 이의가 없으면 전원 찬성한 것으로 간주합니다. 정식으로는 적어도 거수표결하여 찬성/반대수를 세야하겠지만요.
사례 검토를 하다 보니 회의 규칙을 융통성 있게 적용하기 위해서는 “널널하게 넘어가는 태도” 이전에, 규칙의 취지나 적용 범위 등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할 것 같군요. 심각한 규칙 위반인지 아닌지를 먼저 판단해야 하니까요.
규칙의 취지나 적용 범위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필요한 예를 몇 개 더 들어보겠습니다.
[주장1] 부서 보고를 시작하면서 부장이 “서기로 하여금 보고하도록 허락해주시기 바랍니다” 했을 때 한 회원이 “아니오!” 하면 주저 없이 부장은 직접 보고를 해야 합니다.
[검토] ‘아니오!’ 하는 경우는 극히 드뭅니다. 회의를 방해할 의도가 있어 보입니다. 이럴 때 의장은 정식으로 표결을 해서 중의(衆意)를 파악하면 됩니다. 구두표결을 하겠다고 하고 이의가 없으면 찬반을 물어 과반수가 어느 쪽인지 판단하면 됩니다. “아니오!” 했던 회원이 찬반수를 정확히 계수해달라고 하면-이것이 바로 부수동의에 속하는 “찬성표와 반대표를 정확하게 계수해달라는 동의”(표 분리 동의)-거수표결이나 기립표결을 통해 계수하면 됩니다. 한 사람이라도 반대하면 안 된다는 주장은, 어떤 규칙의 적용 범위를 너무 확대한 탓으로 보입니다 - “제38조: 단, 인사 문제는 한 회원이라도 투표를 원하면 투표하여야 하며”. 서기가 대신 보고하게 해달라는 청원은 인사 문제가 아닙니다.
[주장2] 임시노회 안건은 소집통지서에 담긴 안건만 다루어야 하므로 어떤 안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제출된(동의된) 안건은 미리 통지된 안건이 아니며 이런 안건은 불법입니다.
[검토] A 안건을 처리 과정에서 제안된(동의된) 안건이므로 A 안건의 하위 안건이며 엄밀히 말해 A 안건에 포함됩니다. 회원들을 기만하기 위해 소집통지서에 없는 안건을 임시노회에서 전격적으로 기습 상정한 것이 아닙니다. “A 안건과 직접 관련된 안건”으로 가결이든 부결이든 의결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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